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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당신은 자신이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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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여섯 개의 단편 소설이 담긴 은희경 작가의 책 '중국식 룰렛'은 그녀가 지난 2008년부터 2016년 봄까지 잡지에 담은 이야기를 한 편으로 묶은 것으로 술, 옷, 신발, 가방, 책, 사진, 음악에 관한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라가불린은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였다. K는 아내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나에 관해서라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던 그가 아내의 생일마다 주문을 부탁했던 술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래서 나를 이 자리에 부른 것일까. 아내가 남자와 함께 자신의 술집에 나타났다는 걸 알려주려고? 물론 라가불린을 좋아하는 여자가 세상에 아내 혼자일 리 없다. 하지만 때론 공교로운 운명은 악의를 감추기 위해 우연을 가장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 28


천사들은 술을 가리지 않아요. 모든 술에서 공평하게 2퍼센트를 마시죠. 사람의 인생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증발되는 게 있다면, 천사가 가져가는 2퍼센트 정도의 행운이 아닐까요. 그 2퍼센트의 증발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군요 - 44


나 역시 취기가 느껴졌다. 혀에 닿는 위스키가 아내와 마시던 술맛처럼 달콤했다. 당신의 가장 큰 실수는 무엇입니까, 당신이 평생 후회할 만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질문과 대답들이 오고 갔다. 실수와 후회, 분명 그럴 만한 일들이 있었다. 그 댓가로 나는 K의 술집에서 가장 형편없는 술을 선택할 각오로 이곳에 왔다. 그의 게임에 말려들어 아내일지도 모르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분명 망상일 것이다. 사실은 그냥 라가불린을 좋아하는 어떤 여자의 이야기이다. 상관없다. 집에 돌아가면 아내의 컬렉션이 우리의 가장 좋은 시절을 담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행운은 가득 채운 차가운 술병들이, 그것들이 있는 한 천사에게 2퍼센트를 돌려달라고 억울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술잔을 내려다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자신이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 52


K가 그만 문을 닫아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네사람 모두 그날 밤의 파티가 끝났다는 걸 알았다. 취한 네사람은 분명 운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단지 조금 운이 없을 뿐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단지 불행한 것처럼, 그래서 단지 약간의 행운이 더 필요할 뿐인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불운의 총량은 어차피 수정될 수 없는 것이니까. 나는 K에게로 그늘을 드리우며 다가오고 있는 마지막 손님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거기에 천사의 몫도 있을 것이다. 이왕이면 그 영혼이 씽글몰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53


나 혼자 생각했었다. 얼어붙은 땅 깊이에서 뒤척이는 눈먼 씨앗일 뿐이지만, 언젠가 당신이 내게서 꽃피울 봄날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건 영원한 겨울과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괜스레 긴 머리를 잘라버리고 입지 않을 운동복을 사고 지독한 몸살을 앓고 오전이 다 가기도 전에 세끼를 먹어치우고 한밤에 불쑥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한시간씩 골목을 쏘다니고, 그러고도 남은 날이면 약속된 시간에 배달된 우유처럼 내 마음이 당신의 문 앞에서 다소곳이 아침을 기다리고 있던 날들이, 대체 몇번이었는지, 나는 그 마음을 당신이 조금이나마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절대로 알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라고 하는 함박눈이 미친 듯이 내려서 귀퉁이에 홀로 쌓여 있다가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 봄이 되어서야 당신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으면 한다 - 59


그녀를 만나는 동안 나는 경제적 문제를 포함해서 그녀에게 어떤 도움도 충고도 주지 않았다. 미묘한 권력관계나 거기에서 파생되는 의존은 서로의 감정에 불필요한 자의식을 개입시킬 수 있다. 진위를 따지는 순간부터 나와 상대 모두를 지나친 의미 부여로 속박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진심은 대게 이유가 없고 단순한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각기 한표씩을 갖고 공정하게 서로에게 투표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 오래 울었는지 그리고 왜 떠났는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나쁘다거나 부당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포함해 생의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다지 강한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 세상이 운명에 의해 원격조종되는 일종의 기계장치처럼 여겨졌는데 그녀가 떠난 이후 그 느낌이 더 강화되었을 뿐이다 - 62


사실 나는 갖고 싶은 게 별로 없다. 어차피 갖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버린다. 사람들은 모두 뭔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거기 걸맞은 무엇을 더 갖추려고 하고 욕망은 바로 거기에서 생겨나는 게 아닐까. 나는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원하는 것도 없는지 모른다. 필요한 것은 많지만 원한다는 건 그것과는 다른 뜻이다. 그것은 욕망과도 다른 뜻일 것 같다. 내가 깨닫는 모든 것이 그렇듯 당신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당신이 원한 것도 욕망한 것도 아니었다. 당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내 안에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발광 액체가 되어서 당신에게로 흘러가 스며들어 당신이 되는 느낌이었다 - 70


그는 말하고 싶었다. 잘못 어른이 돼버린 사람에게도 아주 가끔 어린 시절의 짧은 꿈과 해후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그것은 생의 찬란한 진품을 되찾는 순간이며, 그때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고 불꽃의 그림자가 강물에 어리면서 진짜 축제가 시작되는 거라고. 그 축제에는 오랜 세월 그토록 멀어지려 했던 사람이 찾아와 이렇게 말해줄지도 모른다. 네 잘못이 아니야. 나보다 앉은키도 작으면서 뭘, 차는 강을 향해 속력을 높여갔다. 가속기의 페달을 밟는 J의 얼굴로 바람이 몰려들었다. 머리카락이 날려 간간이 시야를 가렸다. 그는 알 수 없는 혼란과 슬픔이 차올라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충혈된 눈으로 가로등이 정연히 늘어선 강변도로를 노려보았고 주먹을 들어 이유 없이 경적을 울려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차는 언제나처럼 앞뒤의 차와 일정한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도망 다니는 사람 같았다 - 106


그는 스스로를 자신이 아는 범주 안에서 작은 규모로 삶을 꾸려 나가는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참을성과 조심성이 많고 자신이 속한 조건에 대체로 불만을 품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잘 맞추고 또 인생의 나쁜 점을 피하는 법을 아는 온화한 성격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단지 겁이 많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것만 상대해왔으며 정체를 모르는 것을 집에 들여온 적이 없었다. 그가 발붙이고자 했던 세계의 외곽에서 쫓겨났을 때, 그리고 돌아갈 거처를 찾아야 했을 때도 그는 뭔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몸을 움츠린 채 시간의 불연속성 위를 떠밀려왔는지도 모른다 - 126


미혹과 욕망이 수없이 나를 낭떠러지로 몰았지만 나는 한번도 거짓에 휘둘린 적은 없었다. 결과가 나쁘다 해도 지난 일을 편집하고 방어장치를 만들 만큼 비겁하지는 않았다. 나는 단 하나의 선택을  했었다. 공항에서 가방이 바뀌지 않았다면 친구가 나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 없이 나는 홀로 죽어갔을 것이다. 그런 생각은 의미가 없다. 어차피 생은 절취선처럼 불연속적으로 이어졌다가 약간 위태로운 절단면에 이르러 끊어져버리는 것이니까 - 133


그는 폭음도 하지 않고 여행도 가지 않았다. 청결과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며 스스로 정한 사소한 규칙들을 되도록 지키며 살아왔다. 기준을 낮게 잡으면 낙천적이 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욕망을 조절하면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혼자 맥주캔을 딸 때가 더 좋긴 했지만 어떤 모임에서는 위축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뜻이다. 자기비하로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고 자신의 마이너리티를 도덕적 무기로 내세우는 옹졸함도 부리지 않았다. 그는 남의 입장을 쉽게 이해하는 편이었다. 피해자가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 - 150


살아오는 동안 큰 행운이 없었으니 0.01퍼센트의 불행 또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대체 이처럼 비겁한 자기위안의 논리로 얼마나 많은 억울함과 박탈감에 굴복해왔던 것일까. 식은 밥 같은 중간지대의 안전이 그에게 남긴 것은 고독뿐이었다 - 168


중국식 룰렛 - 10점
은희경 지음/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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