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우리에게 낙원인 제주도는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다

반응형


책을 모으고 독서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하루에 한 번쯤 신간을 구경하기 위해 도서 쇼핑몰을 구경한다. 여름이라 그런지 여행에 관한 책이 많이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제주도에 관한 책이 많았다. 최근 유럽 쪽에는 테러 사건으로 인해 관광객들이 해외 여행을 포기하고 국내로 전환하고 있다. 국내 여행의 대표 관광지로 불리는 제주도이기에 그만큼 제주에 관한 책이 쏟아지고 있다.


제주도에 살면서 현재 내가 속한 지역에 관한 일을 하는 나에게 제주도 여행 책이란 목차부터 너무 뻔했다. 애초에 제주 도민을 공략한 책이 아니었겠지만 대부분의 책 속 내용은 거기서 거기라 읽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알게 된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야'는 여행객보다는 제주도에 사는 사람을 위해 쓴 책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제주 여행에 관한 일을 종사하는 나에게 있어서도 무척이나 중요하며 현재 내가 사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 책을 주문하게 됐다.


최근에 읽었던 제주도에 관한 책은 고희범 저의 '이것이 제주다'였다. '이것이 제주다'는 제주 사람들도 잘 모르는 역사와 문화, 자연환경에 대해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야'와 비슷한 것 같았지만 목차를 비교했을 때 두 책 모두 읽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야' 저자 김형훈 씨는 제주토박이가 아니지만 오래도록 제주도에 살며 현재는 지역 언론사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크게 다섯 가지 주제로 제주도에 관해 이야기해주는데 무엇보다 신화와 역사에 관한 내용이 많이 담겨 제주도에 살고 있음에도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동안 제주도에 관해 많이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어 보니 제주도는 알면 알수록 새로웠다.


첫 번째 장에서는 제주의 산담, 밭담, 올레, 포구, 동자석, 환해장성, 돌하르방, 방사탑 등 제주도에 살면 최소한 한두 번은 만나게 되는 것에 관해 소개됐다. 그중에서도 포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포구가 하나의 관광지나 명소가 아니라 과거 도민들이 죽음마저 불사하고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앞으로 제주도에 있는 여러 포구에 방문한다면 전과는 다른 기분을 느낄 것 같다.


두 번째 장에서는 신흥리 오탑, 대평리, 질지슴, 신지방코지, 썩은섬, 강정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주를 알고 싶다면 꼭 들려야 하는 신흥리 마을과 한라산, 가파도, 마라도, 형제섬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대평리 마을은 아직 가보지 않았기에 꼭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세 번째 장에는 제주도에서도 가장 유명한 오름 중 하나인 용눈이 오름, 철새들이 많이 다녀가는 조개못, 이외 솜반내, 논짓물, 조간대, 금산공원, 한라산, 곶자왈을 소개하고 있다. 각 명소들에 대한 친절한 소개와 함께 저자가 직접 찍은 듯한 훌륭한 사진이 담겨 있어 책을 읽는 내내 한 번쯤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에 따로 메모까지 해 둘 정도였다.


네 번째 장에서는 온평리, 물맞이, 이중섭 문화의 거리, 추사 유배지, 제주해녀, 갈옷, 자리, 제주초가, 신당, 석굴암, 테시폰, 옹기, 제주어, 추자도에 대해 알려준다. 제주도의 역사와 현재까지도 만날 수 있는 여러 문화와 명소에 관해 상세히 알려주며 제주도가 세계자연유산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줬다.


마지막 장에서는 제주 4.3사건, 제주도에 정착한 이주민, 월정리, 원도심에 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야'를 통해 제주도의 무분별한 발전에 관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제주도의 천연 자연을 지키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관광지로서 지역 경제 발전만을 생각하는 것은 나 역시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후에 나의 2세가 태어나 제주도에 대해 알려줄 때 제주의 자연 환경을 오롯이 보여주고 싶다. 여러 볼거리가 가득해 많은 사람들이 구경 오는 것도 좋지만 이곳에서 사는 원주민과 이주민을 위한 보금자리가 훼손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에게 낙원인 제주도는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제주의 환경과 역사를 올바르게 지키고 싶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 제주도 하면 올레를 떠올리는 사람이 대다수가 아닐까 한다. 그만큼 올레는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올레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올레를 안다는 사람들은 그냥 걷는 길로 여기고 있다. 그건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역할이 컸다. 그런데 사단법인 제주올레에서 말하는 올레와 필자가 쓰고 있는 올레는 개념이 전혀 다르다. 제주올레는 '걷는 길'을 말하는 브랜드이지만, 올레는 그와는 다르다. 올레는 단순한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간이다 - 28


- 사람들은 제주바다의 속성을 모른다. 낭만적인 포구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포구를 말이다. 제주바다는 화산섬이기에 다르다. 삶을 위해 필요한 포구는 화산섬이라는 특성상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주도의 해안선은 단조롭고 썰물과 밀물의 차이도 크지 않았다. 그런 특징들은 천연적인 포구를 갖추기 어려웠고, 제주사람들이 얼마나 힘을 들여 포구를 만들었는지를 보여준다. 제주인들은 바다를 경영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며 포구를 만들어갔다. 몸을 던져 숱하게 널린 검은 돌을 등에 지고 날랐다. 담벼락으로, 밭담으로, 혹은 산담으로 쓰였던 돌은 포구를 만드는 데도 쓰였다. 구멍이 뚫린 그 돌들을 하나둘 옮겨 바다를 채우는 작업부터 제주바다의 경영은 시작됐다. 그러나 산업화는 제주만이 가진 포구의 멋을 앗아가고 있다 - 38


- 대부분의 제주포구는 제주사람들의 땀이 배여 있다. 그런데 자연적으로 생겨난 포구도 있었다. 천연포구인 온평리의 쾌성개다. 쾌성개는 탐라국의 기원과 관련 있는 곳이기도 하다. 탐라국의 세 왕자가 세 공주를 맞은 뜻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쾌성개는 인공이 전혀 가미되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의 포구였으며, 1960년대까지도 충천도 선적이 이곳에 배를 대고 뭍으로 해녀들을 실어나르곤 했다 - 40


- '내가 만일 동자석을 세운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제주 돌이 사람을 닮고, 제주사람 역시 돌을 닮을 수밖에 없다면 내가 세우는 동자석은 나를 닮을 테니까. 그러나 제주 사람들은 너무 흔한 것이기에 돌이 인간에게 선물한 것들의 의미를 잊고 산다. 때문에 수많은 동자석은 주인을 떠나 다른 데로 흘러가야만 했다. 석공이 그 사실을 안다면, 무덤의 주인이 그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애통해할까. 동자석은 무덤 곁에 있을 때라야 존재 가치가 있는데 말이다 - 46


- 조천읍 신흥리엔 가슴 아픈 전설이 흐른다. 이곳 노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신흥리의 이야기를 가슴속 깊은 곳에서 꺼내줬다. 현용준이 펴낸 '제주도 전설'에도 신흥리 마을지에도 없는 옛이야기다. 신흥마을이 생긴 뒤다. 왜구들이 들락날락했다. 오죽하면 신흥리의 옛 이름이 왜포일까. 주민들은 풍족하지 못한 삶 때문에 바다에 나가 파래, 톳 등을 캐며 생계를 이어갔다. 어느날 한 왜인이 '멤을 거리러' 바다로 나온 박씨를 겁탈하려 든다. 그러자 박씨는 도망치다 볼래낭(보리수나무) 밑에서 죽고 만다. 주민들은 박씨를 위해 그 자리에 당을 만들어 모시고 있다. 그곳이 볼래낭할망당이다. 박씨는 아기를 낳지 못하고 저세상 사람이 됐고, 주민들은 양자를 들여 신흥동 산밭에 하르방당도 세웠다 - 73


- 제주도를 한 바퀴 빙 돌며 만들어놓은 해안도로. 도로가 나지 않은 해안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됐다. 이처럼 제주도를 둘러싼 해안도로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그 반대로 많은 것들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한다. 신흥리의 큰 포구는 해안도로 때문에 사라졌다. 볼래낭할망당에서 동쪽으로 가면 이곳 주민들이 '엉알'이라고 부르는 포구가 나온다. 30~40톤에 달하는 배도 이곳에 댔으며, 전남 강진에서 옹기를 실은 배가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해안도로가 개통되면서 계곡을 방불케 하던 옛 포구는 영원히 사라졌다. '비배기사막'이라 부르는 모래동산도 양어장이 들면서 사라졌고, 거대한 환해장성도 볼품없는 밭담으로 변하고 말았다 - 79


- 대평리는 중국과의 만남이 서려 있는 곳만큼이나 낯선 이방인 그대로다. 제주에 있으면서도 제주답지 않은 고을이라면 너무 과장됨일까. 한국의 산야는 곳곳에 골짜기를 만들고, 그 골짜기를 따라 마을을 이룬다. 굽이굽이 산을 휘감아 내려가는 도로를 골짜기가 벗삼는 그 맛이 뭍 지방을 여행할 때 나그네들에게 주는 하나의 매력이다. 그런 기분을 대평리에서 느끼게 된다. 아니, 제주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새로움이다 - 82


- 여행이 업이 아닌 이상 그 자체가 일상이 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을 하려면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 뒤따른다. 어차피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잃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 하는데, 바닷가 여행을 하다가 감기라는 불청객을 맞기도 한다. 감기를 달고 살아가는 사람에겐 전혀 낯선 일이 아니겠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그야말로 팔팔하고 생기 넘치던 익숙함고의 결별이 아닐까 - 87


- '제주도의 푸른 밤'을 찾아 많은 이들이 제주에 온다. 50만 명을 좀 웃돌던 제주도의 인구는 최근 몇 년 사이에 10만 명 가까이 늘어 이젠 60만 명을 넘어서서, 조만간 70만 명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한다. 긍정 부정을 떠나서 많은 이들이 살다 보면 땅이 그 땅 본연의 역할을 하는 게 어려워진다. 땅에 무언가 계속 들어선다는 말이다. 썩은섬도 조만간 그런 운명을 겪지 않을까 해서 우려된다. 섬이 아름다운 이유는 물과 떨어진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 104


- 용당리 바닷가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곳 주민들의 삶은 바다가 지배하고 있다. 원래 용수리였으나 1952년 용수리에서 떨어져 나오며 용당리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용당 사람들이 솔해라고 부르는 바다는 1960년대 들어서야 용당리 것이 됐다. 마을 사람들이 솔해로 나오려면 바다로 난 길을 족히 2km는 걸어야 했다. 마을과 떨어져 있지만 바다를 찾는 이유가 있다. 솔해에서 나는 톳, 천초, 소라 등은 용당마을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소득원이기 때문이다. 솔해가 용당 사람들의 삶을 지탱하는 재원이라면, 솔해에서 뭍으로 나 있는 조개못은 그곳 사람들의 쉼터였다. 가족을 데리고 바다도 구경하고, 갯벌탐사도 벌일 수 있는 그런 곳이다 - 126


- 썰물 때 바다는 공존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사람이 혼자 살지 않듯 사람과 자연도 하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우린 그 바다를 메워오기를 수십 차례 해왔다. 바로 내수면이나 공유수면 매립이었다. 바다를 배우면 새로운 땅이 만들어진다. 순전히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다. 육지에선 간척사업이라고 하면서 '국토가 늘었다'고 강조해 왔다. 새만금도 그렇게 됐다. 아니, 제주바다도 그렇게 돼왔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각종 개발에 따라, 해안도로의 등장에 따라 바다는 메워지고 있다. "바다가 메워지면 뭐가 좋을까"라고 물어보자. 바다에 시멘트를 실고, 수많은 사람을 갖다놓으면 뭐가 좋은지, 자연은 글자 그대로일 때가 이름값을 한다. 바다를 메우는 것과 바다를 메우지 않고 생태체험을 하는 것 가운데 어떤 게 더 이득일까 - 143


- 겨울바람은 한라산의 남북으로도 서로 다른 광경을 보여준다. 1100도로를 기준으로 한다면 다소 따뜻한 남쪽보다는 북쪽의 눈꽃이 더 아름답다. 북서계절풍은 북쪽의 눈을 날리고, 그 눈은 가지에 하나둘 붙어 눈꽃이 된다. 정신없이 불어대는 바람에 눈밭이 나무에 꽂히듯, 아니 박히면서 만들어지는 게 눈꽃이다. 한라산의 눈꽃은 뭍지방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제주만의 것이기도 하다. 뭍에서 그런 눈꽃을 만나려면 지리산의 새석평전쯤은 가야 한다. 어느 코스로 갈까. 한라산은 코스마다 특색이 있다. 한라산 정산까지 갈 것인지, 그렇지 않을지를 선택해야 한다. 정상까지 간다면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를 택한다. 성판악 코스는 한라산 동쪽 주능선으로 다소 밋밋하지만 힘들지 않고 편안하게 오를 수 있다. 관음사 코스는 한라산의 능선과 계곡 등 깊은 맛을 느끼며 등산할 수 있다 - 162


- 정상을 굳이 가지 않는다면 어리목으로 올라 영실로 내려오는 코스를 권하고 싶다. 어리목은 한라산의 서북 방면이어서 겨울철 계절풍을 곧바로 받는다. 따라서 오를 때는 바람을 등지며 갈 수 있지만 내려올 때는 바람을 맞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목 코스를 이용해 오른 뒤 서남 방면의 영실 코스로 내려오면 바람도 피하고 겨울 산행의 여러 느낌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한라산은 겨울이 좋다. 요즘은 한라산을 오르는 이들이 너무 많아 탈이긴 하지만 한라산이 덜 아프게, 오르는 이들을 통제하는 방법은 없을까 - 163


- 온평리 바닷가는 쾌성개라 부른다. 세 신인이 이곳에 떠내려온 석함을 보고 쾌성을 질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석함이 닿은 포구는 오퉁이다. 그러나 오퉁은 한참 헤맨 뒤 나타난다. 팻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여기에 사는 이들도 단박에 찾아내지 못하기도 한다 - 174


- 이중섭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서귀포에서 피난생활에 들어간다. 그해 1월부터 12월까지 솔동상 작은 초가의 2평도 채 안 되는 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서귀포시는 이중섭이 살았던 초가를 복원했다.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된 이 초가는 그의 채취가 묻어 있는 국내 유일의 유적이다. 여기에 놀라운 사실을 하나 더 쓰겠다. 이중섭을 아는 이가 여기 초가에 머물고 있다. 어느새 100세를 바라보는 김순복 할머니다. 우리 나이로 96세인 김순복 할머니는 지금도 정정하다. 서귀포시에서 초가를 매입했으나 할머니는 떠나지 않고 있다. 이중섭의 흔적을 끝까지 간직하고 싶어서일까 - 190


- '조선왕조실록'에 '해녀'라는 단어는 단 한 차레 등장한다. 이때 해녀는 제주의 여성을 말하는 단어가 아니다. 동래부(부산)에 설치된 왜관을 상대로 생선과 채소를 파는 이들을 가리켜 해녀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어쨌든 제주에서 해녀라는 단어는 애당초 없었다. 물질의 의미를 들여다본다면 해녀 스스로가 말하는 '좀녀'가 직업으로서의 물질 행위에 보다 가깝다. '좀녀'로 쓰는 한자는 물질을 하는 기본 요소인 잠수 행위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는 '좀녀'이지만 뭇사람들에겐 '해녀'가 익숙해져 버렸다. 사회적 언어가 돼버린 '해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됐다. 고유 제주어가 사라지다니 너무 아쉽다 - 204


- 해녀들의 도구 가운데 그들의 사고방식을 읽을 수 있는 걸 하나 소개한다. 작은 전복 껍질인 본조갱이가 있다. 해녀들은 잠수로는 으뜸이지만 하염없이 바닷속에 몸을 담가둘 순 없다. 물질을 하다 보면 지치게 마련이고, 숨을 쉬어야 한다. 바다에서 좋은 물건을 봤는데 캐기 힘들면 어찌해야 할까. 그때 쓰는 게 본조갱이다. 해녀들은 미처 캐내지 못한 해산물 곁에 본조갱이를 놔둔다. 그러면 그것을 본 다른 해녀들은 임자가 있는 것으로 알고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만의 불문율이다 - 208


- 조선 초만 하더라도 제주사람들의 배 건조술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그러나 제주사람들의 발은 묶였다. 조선정부가 제주를 뜨지 말라는 '출륙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먼 바다로 나서지 못하는 제주사람들은 테우(떼배)를 만들며 삶을 살았다. 테우를 쓰면서 그물로 뜨는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 보니 자리 사냥은 핍박받는 제주사람들의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 선택이 이젠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자리는 날 것으로, 구이로, 젓갈로 우리 제주사람의 품에 남아 있다. 누가 뭐래도 6월엔 자리만한 게 없다. 제주에서는 '자리'라고 부르지만 그들의 본 이름은 자리돔이다. 맛은 6월 장마철이 최고다. 산란기여서 뼈가 나긋나긋해 뼈째 썰어먹기에 그만이다 - 220


- 지금도 우리 할머니들은 신당을 찾는다. 솔직히 말하면 글쓴이의 어머니도 최소한 1년에 한 번은 신당에 들른다.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자식과 손자들이 아무 탈없이 잘살라고 그곳에서 무언가 읊어댄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건 어느 종교에서나 마찬가지다.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지 않다. 불교에도, 우리 할머니들이 믿는 민간신앙에도 있다. 경전이 있어야만 종교는 아니지 않는가. 어느 것이나 종교는 하나다. 그것이 제주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자리한 것이라면 더 그렇지 않을까 - 234


- 족보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 이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족보를 믿는 사람들은 있을까. 우문을 꺼낸 이유는 계복학이라는 게 '불가지', 즉 알 수 없는 영역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한 세대를 대략 30년으로 잡곤 한다. 본격적인 족보가 만들어진 시기가 17세기, 즉 1600년대이니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이다. 이때 만들어진 족보는 조상을 거슬로 올라가서 만드는데 최고로 올라가더라도 기원년이 시작이다. 세대를 기준으로 하면 고작 60세대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사피엔스가 세상에 등장한 시기를 지금으로부터 15만 년 전으로 잡는다. 그걸 기준으로 한다면 제대로 된 우리 조상의 세대는 5,000세대여야 맞다. 그러나 계보학적으로는 길어야 60세대이니, 모든 조상의 99%는 알 수 없다는 답이 나오는 셈이다 - 286


- 언젠가는 이주민도 원주민이 된다. 그러기에 제주에 오고자 하는 이들은 제주를 먼저 알고 와야 한다. 제주에 먼저 온 이들도 마찬가지다. 어설프게 제주를 알고, '제주도가 이렇다'고 말을 해서는 곤란하다. 이주민들은 제주에 대한 공부에 열중하고, 나름대로 역작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다 간혹 왜곡도 저지른다. 그런 왜곡을 볼 때 원주민들은 화가 난다. 그러니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제주에 이주를 꿈꾸시는 분, 이미 이주를 해오신 분들이 제주사랑이 넘치는 것은 좋지만, 원주민의 속마음을 우선 이해하려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이주민에서 원주민으로 성공적인 탈바꿈을 하게 된다 - 297


- 개발행위는 기억의 파괴를 부르는 일이다. 원도심에서 기억은 무척 중요하다. 기억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가슴에, 머리에 차 있는 생각들이다. 원도심이 화두로 떠오른 건 그런 기억의 저장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게 뭔가를 했던 일이나 장소에 대한 애착을 갖는다. 그건 추억이다. 자신이 가진 추억을 되새기려고 원도심을 찾는다면 그게 바로 기억의 공간으로서 역할을 한다. 기억은 사라지지만 기억을 보존하는 방법으로는 기억이 지닌 것들을 '있게 놔두는' 것일 수도 있다 - 307



제주는 그런 곳이 아니야 - 10점
김형훈 지음/나무발전소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