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

다른 소설에서 느껴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

반응형


한강, 채식주의자, 맨부커상, 인터넷 포털을 탐색하는 도중 국내 최초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을 받은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알게 됐다. 그전까지만 해도 한강이라는 작가가 누군지도 몰랐고, 그녀가 쓴 채식주의자 역시 읽어보지 않았다.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을 만큼 대단한 이야기가 담겨 있겠느냐는 생각과 함께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의 책을 결제했다.


난이도가 꽤 높을 책이라 생각했다. 책을 읽기 전 채식주의자라는 단어 자체가 나에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펼치고 읽는 동안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심오하고 정교한 내용이 이 소설 속엔 다른 소설에서 느껴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 채식주의자를 읽을 때까지는 3개의 단편 소설이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몽고반점의 중간쯤 세 개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 전체적인 스토리가 대강 이해됐다. 


1장에서는 주인공 김영혜와 그녀의 남편에 대해 등장한다. 김영혜의 남편은 어느 날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되어 버린 김영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국 참다 못해 그녀의 가족에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말보단 주먹이 먼저 앞서는 사람으로 결국 김영혜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만다. 고기를 먹을 바엔 자살을 선택해 칼로 손목을 그어버린 김영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2장에서는 자살을 시도했던 김영혜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간 그녀의 언니 남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신의 예술 작품의 대상자로 처제인 김영혜를 선택한 그는 마지막 부분에선 예술이 아닌 욕정을 선택한다. 끝 부분에서는 아내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후회가 아니라 처제 김영혜의 몸만을 떠올린 그의 모습이 한편으론 추악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3장에서는 김영혜의 언니 이야기가 다뤄진다. 그녀는 여동생 김영혜와 겪었던 상처와 함께 자신이 현재 고통 받고 있는 것들에 대해 절망과 후회를 하지만 그럼에도 아들 지우만을 생각하는 모성애를 느끼게 해줬다.


작가 한강이 채식주의자 김영혜와 그녀의 언니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를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을 것 같다. 누군가 나에게 읽을만한 소설책을 알고 싶다면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끄찍하게 이상한 느낌을 - 19


이해할 수 없겠지. 예전부터 난, 누군가가 도마에 칼질을 하는 걸 보면 무서웠어. 그게 언니라 해도, 아니, 엄마라 해도, 왠지는 설명 못해. 그냥 못 견디게 싫은 느낌이라고밖엔,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들한테 다정하게 굴곤 했지. 그렇다고 이제 꿈에 죽거나 죽인 사람이 엄마나 언니였다는 건 아니야. 다만 그 비슷한 느낌, 오싹하고, 더럽고, 끔찍하고 잔인한 느낌만이 남아 있어.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인 느낌, 아니면 누군가 나를 살해한 느낌, 겪어보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한, 단호하고, 환멸스러운, 덜 식은 피처럼 미지근한 - 37


꿈에 누군가의 목을 자를 때, 끝까지 잘리지 않아 덜렁거리는 머리채를 잡고 마저 칼질을 할 때, 미끌미끌한 안구를 손바닥에 올려놓을 때, 그러다 깨어날 때, 생시에, 뒤뚱거리며 내 앞을 걸어 가는 비둘기를 죽이고 싶어질 때, 오래 지켜보았던 이웃집 고양이를 목조르고 싶을 때,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맺힐 때,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때, 다른 사람이 내 안에서 솟구쳐올라와 나를 먹어버린 때, 그때, 입 안에 침이 고여. 정육점 앞을 지날 때 나는 입을 막아. 혀뿌리부터 차올라 입술을 적시는 침 때문에, 입술 사이로 새어나와 흘러내리려는 침 때문에 - 42


다섯 바퀴째 돌자 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있어. 줄에 걸린 목에서 피가 흘러. 목이 아파 낑낑대며, 개는 질질 끌리며 달려. 여섯 바퀴째, 개는 입으로 검붉은 피를 토해, 목에서도, 입에서도 피가 흘러. 거품 섞인 피, 번쩍이는 두 눈을 나는 꼿꼿이 서서 지켜봐, 일곱 바퀴째 나타날 녀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축 늘어진 녀석을 오토바이 뒤에 실은 아버지가 보여. 녀석의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을 나는 보고 있어 - 53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쉬게 할 수 없어 - 61


그 이미지만 아니었다면 이 모든 조바심, 불편함, 불안, 고통스러운 의심과 자기검열을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그의 선택으로 인한 발걸음 한번에 그가 이뤄온 모든 것을, 가정마저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경험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많은 것들이 그의 안에서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신은 정상적인 인간인가, 또는 제법 도덕적인 인간인가.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강한 인간인가. 확고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질문들의 답을 그는 더이상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 75


사십년 가까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찬란한 희열이, 몸속 알 수 없는 곳에서 조용히 흘러나와 자신의 붓끝에 고이는 것을 그는 침묵 속에서 느꼈다. 가능한 한 오래 그 희열을 지속시키고 싶었다. 목까지만 조명을 받아 캄캄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으나, 허벅지 안쪽을 붓끝이 스쳐갈 때 떨림이 전해져오는 것으로 미루어 예민하게 깨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가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고도, 그렇다고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에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다 - 107


그는 그녀의 몸을 앞으로 돌렸다. 눈을 찌르는 빛이 그녀의 상체에서부터 비쳐 그는 그녀의 가슴 윗부분을 볼 수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벌렸는데, 그녀가 잠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허벅지의 낭창낭창한 탄력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을 때, 짓무른 잎사귀에서 흐르는 것 같은 초록빛 즙이 그녀의 음부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향긋하면서도 씁쓸한 풀냄새가 점점 아릿해져 그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절정의 직전에 가까스로 몸을 빼냈을 때, 그는 자신의 성기가 온통 푸르죽죽하게 물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모를 싱그러운 즙으로 그의 아랫도리와 허벅지까지 시퍼런 풀물이 들어 있었다 - 117


죽었으면 좋겠어. 죽었으면 좋겠어. 그럼 죽어. 죽어 버려. 왜 눈물이 흘러내리는지 모르는 채 그는 운전대를 거머쥐고. 몇번이고 와이퍼를 작동시키다가 부연 것은 유리창이 아니라 자신의 눈이라는 것을 깨닫곤 했다. 죽었으면 좋겠어.라는 말이 왜 주문처럼 머리 안쪽으로 쉴새없이 터져나오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마치 자신 안에 있던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듣고 답하듯, 그럼 죽어.라는 대답이 쉴새없이 몰아쳐오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흡사 타인들의 대화 같은 그 말들만이 그의 덜덜 떨리는 몸을 주문처럼 진정시키는 까닭도 알 수 없었다. 가슴이, 아니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 그는 양쪽 유리창을 활짝 열었다. 밤바람과 차들의 굉음 속에 그는 어두운 간선 도로를 질주했다. 떨림은 손에서부터 시작해 온몸으로 번져, 숫제 이를 부딪치며 그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속도계를 볼 때마다 흠칫 놀라며, 경련하는 손가락으로 눈자위를 물질렀다 - 132


그녀는 천천히 그들에게서 몸을 돌려 베란다 쪽으로 다가갔다. 미닫이문을 열어 찬바람이 임시에 밀려들어오도록 했다. 그는 그녀의 연두빛 몽고반점을 보았고, 거기 수액처럼 말라붙은 그의 타액과 정액의 흔적을 보았다. 갑자기 자신이 모든 것을 겪어버렸다고, 늙어버렸다고, 지금 죽는다 해도 두렵지 않을 것 같가도 느꼈다. 그녀는 베란다 난간 너머로 번쩍이는 황금빛 젖가슴을 내밀고, 주황빛 꽃잎이 분분히 막힌 가랑이를 활짝 열었다. 흡사 햇빛이나 바람과 교접하려는 것 같았다. 가까워진 앨뷸런스의 사이렌, 터져나오는 비명과 탄성, 아이들의 고함, 골목 앞으로 모여드는 웅성거리는 소리들을 그는 들었다. 여러개의 급한 발소리들이 층계를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베란다고 달려가, 그녀가 기대서 있는 난간을 뛰어넘어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삼층 아래로 떨어져 머리를 박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깨끗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못박혀 서서,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 활활 타오르는 꽃 같은 그녀의 육체, 밤사이 그가 찍은 어떤 장면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번쩍이는 육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 147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 166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모르게 그녀에게만은 조심스러워 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 191


그 저녁, 영혜의 말대로 그들이 영영 집을 떠났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날의 가족모임에서, 아버지가 영혜의 뺨을 치기 전에는 그녀가 더 세게 팔을 붙자았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영혜가 처음 제부를 인사시키려 데려왔을 때, 어쩐지 인상이 차가워 보여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육감대로 그 결혼은 그녀가 만류했다면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그렇게 그녀의 영혜의 운명에 작용했을 변수들을 불러내는 일에 골몰할 때가 있었다. 동생의 삶에 놓인 바둑돌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헤아리는 일은 부질없었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생각은 멈출 수가 없었다. 만일 그녀가 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마침내 거기에 생각이 이를 때, 그녀의 머리는 둔중히 마비되곤 했다 - 192


기적처럼 고통이 멈추는 순간은 웃고 난 다음이다. 지우가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 그녀를 웃기고, 그녀는 문득 멍해진다. 어떨 때는 자신이 웃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더 웃기도 했다. 그럴 때 그녀의 웃음은 즐거움이라기보다 혼돈에 가까울 테지만, 지우는 그렇게 그녀가 웃는 모습을 좋아한다 - 204


그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의 물결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결코 따뜻한 말이 아니었다. 위안을 주며 그녀를 일으키는 말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 206


그냥 꿈이야. 그날의 지우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가 소리내어 내뱉는 말이다.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그녀는 두 눈을 흡뜨고 황황히 좌우를  살핀다. 구급차는 비탈진 도로를 여전히 빠르게 달려내려가고 있다. 오래 손질하지 못한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그녀의 손이 눈에 보이게 떨린다. 그녀는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 자신이 그렇게 쉽게 아이를 버리려 할 수 있었는지, 자신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을 잔인한 무책임의 죄였으므로, 누군가에게 고백할 수도, 용서를 구할 수도 없다. 다만 소름끼칠 만큼 담담한 진실의 감각으로 느낄 뿐이다. 그와 영혜가 그렇게 경계를 뚫고 달려나가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모래산처럼 허물어뜨리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무너졌다면 돌아오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영혜가 토한 피는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나왔어야 할 피일까 - 219


조용히, 그녀는 숨을 들이마신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끌질기다 - 221


채식주의자 - 10점
한강 지음/창비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