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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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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하고 싶은 구절


소설이라는 장르는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 같은 것입니다. 로프는 틈새가 넓고 편리한 발판도 준비되었습니다. 링도 상당히 널찍합니다. 참여를 저지하고자 대기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도 그리 빡빡하게 굴지 않습니다. 현역 레슬링 선수도 그런 쪽으로는 애초에 어느 정도 포기해버린 상태라서 '좋아요. 누가라도 다 올라오십쇼'라는 기풍이 있습니다. 개방적이라고 할까, 손쉽다고 할까, 융통성이 있다고 할까, 한마디로 상당히 '대충대충'입니다. - 16


내가 생각하기에, 소설을 쓴다는 건 너무 머리가 좋은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작업인 것 같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지성이나 교양이나 지식은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합니다. 나 같은 사람도 역시 최저한의 지성이나 지식은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필시, 라고 할까. 아마도, 정말로 틀림없이 그러냐고 정색하고 물으신다면 약간 좀 자신이 없긴 합니다만, 하지만 너무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 혹은 특출하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소설 쓰는 일에는 맞지 않을 거라고 나는 항상 생각합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상당히 저속의 기어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실감으로 말하자면 걷는 것보다는 약간 빠를지도 모르지만 자전거로 가는 것보다는 느리다, 라는 정도의 속도입니다. 의식의 기본적인 작동이 그런 느린 속도에 적합한 사람도 있고 적합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 20


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무튼 효율성이 떨어지는 작업입니다. 이건 '이를테면'을 수없이 반복하는 작업입니다. 하나의 개인적인 테마가 있다고 합시다. 소설가는 그것을 다른 문맥으로 치환합니다.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한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가 끝도 없이 줄줄 이어집니다. 한없이 패러프레이즈의 연쇄지요. 꺼내도 꺼내도 안에서 좀 더 작은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 인형 같은 것입니다. 이토록 효율성이 떨어지는, 멀리 에둘러 가는 작업은 이것 말고는 달리 없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까지 듭니다. 맨 처음의 테마를 그대로 척척 명확히, 지적으로 언어화할 수 있다면 '이를테면'이라는 치환 작업은 전혀 필요 없으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설가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 23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몹시 '둔해빠진' 작업입니다. 거기에 스마트한 요소는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이것도 아니네. 저것도 아니네' 하고 오로지 문장을 주물럭거립니다. 책상 앞에서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며 하루 종일 단 한 줄의 문장적 정밀도를 조금 올려본들 그것에 대해 누군가 박수를 쳐주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 "잘했어. 잘했어" 하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혼자 납득하고 혼자 입 다물고 고개나 끄덕일 뿐입니다. 책이 나왔을 때, 그 한 줄의 문장적 정밀도를 주목해주는 사람이라고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바로 그런 작업입니다. 엄청 손이 많이 가면서 한없이 음침한 일인 것입니다. - 24


야구르트 선두 타자는 미국에서 온 데이브 힐턴이라는 호리호리한 무명의 선수였습니다. 그가 타순 1번이었습니다 .4번은 찰리 매뉴얼입니다. 나중에 필리스의 감독으로 유명해졌는데 그 당시 그는 실로 힘세고 무시무시한 인상의 타자여서 일본 야구팬에게는 '붉은 도깨비'라는 별명으로 통했습니다. 히로시마의 선발 투수는 분명 다카하시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야쿠르트의 선발은 야스다였습니다. 1회 말, 다카하시가 제1구를 던지자 힐턴은 그것을 좌중간에 깔끔하게 띄어 올려 2루타를 만들었습니다. 방망이가 공에 맞는 상쾌한 소리가 진구 구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띄엄띄엄 박수 소리가 주위에서 일었습니다.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그때의 감각을 나는 아직도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하늘에서 뭔가가 하늘하늘 천천히 내려왔고 그것을 두 손으로 멋지게 받아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어째서 그것이 때마침 내 손안에 떨어졌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건 아무튼 그것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계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어에 epiphany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로 번역하면 '본질의 돌연한 현현', '직감적인 진실 파악'이라는 어려운 단어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고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라는 느낌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날 오후에 내 신상에 일어났습니다. 그 일을 경계로 내 인생의 양상이 확 바뀐 것입니다. 데이브 힐턴이 톱타자로 진구 구장에서 아름답고 날카로운 2루타를 날린 그 순간에 - 45


언어란 원래 터프한 것입니다. 기나긴 역사가 뒷받침해주는 강인한 힘을 가진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어떤 식으로 거칠게 다루든 그 자율성이 손상되는 일은 일단 없습니다. 언어가 가진 가능성을 생각나는 한 모든 방법으로 시험해보는 것은, 그 유효성의 폭을 가능한 한 넓혀가는 것은, 모든 작가에게 주어진 고유한 권리입니다. 그런 모험심 없이는 새로운 것은 탄생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일본어는 지금도 어떤 의미에서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그 도구성을 최대한 깊이 추구해나가는 것은,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일본어의 재생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 52


소설을 슬 때 '문장을 쓴다'기보다 오히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에 가까운 감각이 있습니다. 나는 그 감각을 지금도 소중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컨대 머리로 문장을 쓴다기 보다 오히려 체감으로 문장을 쓴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리듬을 확보하고 멋진 화음을 찾아내고 즉흥연주의 힘을 믿는 것. 아무튼 한밤중에 주방 식탁 앞에 앉아 새롭게 획득한 나 자신의 문체로 소설을 쓰고 있으면 마치 새로운 공작 도구를 손에 넣었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습니다. 아주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건 내가 서른 살을 앞두고 느꼈던 마음의 '공동' 같은 것을 멋지게 채워주는 듯했습니다 - 53


첫 소설을 쓸 때 느꼈던, 문장을 만드는 일의 '기분 좋음', '즐거움'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습니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주방에서 커피를 데워 큼직한 머그잔에 따르고 그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킵니다. 그리고 '자, 이제부터 뭘 써볼까'하고 생각을 굴립니다. 그때는 정말로 행복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뭔가 써내는 것을 고통이라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소설이 안 써져서 고생했다는 경험도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내 생각에는, 만일 즐겁지 않으면 애초에 소설을 쓰는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고역으로서 소설을 쓴다는 사고방식에 나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소설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57


작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격'이라는 점입니다. 상은 어디까지나 그 자격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작가가 행해온 작업의 성과도 아니고 보상도 아닙니다. 하물며 결론 같은 것도 아니에요. 어떤 상이 그 자격을 어떤 형태로든 보장해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작가에게는 '좋은 상'이라는 얘기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혹은 도리어 방해물이 되고 성가심의 원인이 된다면, 그것은 유감스럽지만 '좋은 상'이라고 할 수 없다, 라는 얘기입니다. - 83


자신만의 오리지널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는 데는 우선 출발점으로서 '나에게 무엇을 플러스해간다'는 것보다 오히려 '나에게서 무언가를 마이너스 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정보 과다라고 할까 짐이 너무 많다고 할까, 주어진 세세한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자기표현을 좀 해보려고 하면 그런 콘텐츠들이 자꾸 충돌을 일으키고 때로는 엔진의 작동 정지 같은 상태에 빠집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뛰어볼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선 필요 없는 콘텐츠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정보 계통을 깨끗하게 해두면 머릿속은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것입니다. - 105


만약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 110


젊은 시절에는 한 권이라도 더 많은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뛰어난 소설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소설도, 혹은 별 볼 일 없는 소설도 괜찮아요. 아무튼 닥치는 대로 읽을 것. 조금이라도 많은 이야기에 내 몸을 통과시킬 것. 수많은 뛰어난 문장을 만날 것. 때로는 뛰어나지 않은 문장을 만날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작업입니다. 소설가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기초 체력입니다. 아직 눈이 건강하고 시간이 남아도는 동안에 이 작업은 똑똑히 해둡니다. 실제로 문장을 써보는 것도 분명 중요하지만, 순위로 보자면 그건 좀 나중에라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 119


주변 인물들이나 어떤 일에 대해 사사삭 콤팩트하게 분석해서 '그건 이런 거야', '저건 이러저러해', '걔는 이러이러한 녀석이야'라는 식으로 단시간에 명확한 결론을 내놓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소설가로는 그리 적합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인가 하면 평론가나 저널리스트가 더 적합하겠지요. 혹은 학자가 적합합니다. 소설가로 적합한 사람은 이를테면 '이건 이렇다'라는 결론이 머릿속에서 내려지더라도, 혹은 자칫 내려질 것 같더라도 '아니 잠깐, 어쩌면 이건 나 혼자만의 억측일 수도 있어'라고 멈춰 서서 다시 생각해보는 사람입니다. '세상일이란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나중에 뭔가 새로운 요소가 불쑥 튀어나오면 얘기가 백팔십도 달라질지도 모르잖아'라는 식으로 - 120


제임스 조이스는 '상상력이란 기억이다'라고 실로 간결하게 정의했습니다.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조이스, 완전 정답입니다. 상상력이란 그야말로 맥락 없는 단편적인 기억의 조합을 말합니다. 단어의 의미상으로는 좀 모순된 표현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유효하게 조합된 맥락 없는 기억'은 그 자체의 직관을 갖고 예견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스토리의 올바른 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125


'소설을 쓰기 위해 필요한 소재가 나에게는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약간의 시점을 바꾸면, 발상을 전환하면, 소재는 당신 주위에 그야말로 얼마든지 굴러다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당신의 눈길을 받고 당신의 손에 잡혀 이용되기를 기다립니다. 인간의 삶이란 얼핏 보기에는 아무리 시시하더라도 실은 그런 흥미로운 것을 자연스럽게 줄줄이 만들어냅니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건전한 야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키포인트입니다. - 137


만약 당신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주위를 주의 깊게 둘러보십시오. 라는 것이 이번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세계는 따분하고 시시한 듯 보이면서도 실로 수많은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원석이 가득합니다. 소설가란 그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멋진 것은 그런 게 기본적으로 공짜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올바른 한 쌍의 눈만 갖고 있다면 그런 귀중한 원석은 무엇이든 선택 무제한, 채집 무제한입니다. 이런 멋진 직업, 이거 말고는 별로 없는 거 아닌가요? - 140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예술가가 되어서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부자유한 격식을 차리는 것보다 극히 평범한,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자유인이면 됩니다. - 150


장편소설은 말 그대로 '긴 이야기'이기 때문에 구석구석까지 나사를 팽팽히 조여버리면 독자는 숨이 막힙니다. 군데군데 문장을 헐렁헐렁하게 풀어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 쪽의 호흡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체와 세부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하는 것, 그런 관점에서 문장의 세밀한 조정을 행합니다. 이따끔 평론가 중에 장편소설의 일부분을 뽑아 '이렇게 조잡한 문장을 써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 생각을 말하자면, 그건 그다지 공정한 행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장편소설이라는 것에는 어느 정도 조잡한, 헐렁하게 풀어진 부분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있어야 팽팽히 조인 부분이 정당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 153


어떤 문장이든 반드시 개량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아무리 '잘  썼다', '완벽하다'라고 생각해도 거기에는 좀 더 좋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퇴고 단게에서는 자존심이나 자부심 따위는 최대한 내던져버리고 달아오른 머리를 적정하게 식히려고 노력합니다. 단지 그 달아오른 머리를 지나치게 식혀버리면 퇴고 자체를 못 하니까 그런 쪽으로는 약간 조심해야 합니다만, 그러고는 외부의 비판에 견뎌낼 태세를 정비합니다. 뭔가 재미없는 소리를 듣더라도 가능한 한 꾹 참고 꿀꺽 삼킨다. 작품이 출간된 뒤에 들어오는 비평을 마이페이스로 적당히 흘려 넘긴다.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을 쓰다가는 몸이 당해내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작품을 쓰는 동안에는 주위에서 들어오는 비평, 조언은 가능한 한 허심탄회하게, 겸허하게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옛날부터의 나의 지론입니다. - 159


고독한 작업, 이라고 하면 너무도 범속한 표현이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실제로 상당히 고독한 작업입니다. 때때로 깊은 우물 밑바닥에 혼자 않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아무도 구해주러 오지 않고 아무도 "오늘 아주 잘했어"라고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주지도 않습니다. 그 결과물인 작품이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일도 있지만 그것을 써내는 작업 그 자체에 대해 사람들은 딱히 평가해주지 않습니다. 그건 작가 혼자서 묵묵히 짊어지고 가야 할 점입니다. - 179


소설가의 기본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말을 빠구면 의식의 하부에 스스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속 어두운 밑바닥으로 하강한다는 것입니다. 큼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작가는 좀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큼직한 빌딩을 지으려면 기초가 되는 지하 부분도 깊숙이 파 들어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치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그 지하의 어둠은 더욱더 무겁고 두툼해집니다. - 188


혼돈이란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나 존재합니다. 내 안에도 있고 당신 안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실생황에서 일일이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외부를 향해 드러내야 할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 봐. 내가 떠안은 혼돈이 이렇게나 크다니까" 하고 남들 앞에 자랑스럽게 내보일 만한 것은 아니다, 라는 얘기입니다. 자신의 내적인 혼돈을 마주하고 싶다면 입 꾹 다물고 자신의 의식 밑바닥에 혼자 내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혼돈은, 정면으로 마주할 만한 가치가 있는 참된 혼돈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발밑에 깊숙이 잠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 194


개인과 시스템이 서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온전하게 혐의하면서 각자에게 가장 유효한 접점을 찾아나가는 것이 가능한 장소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곳에서 자유롭게 팔다리를 쭉쭉 펴고 느긋하게 호흡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제도, 엄격한 상하 관계, 효율, 따돌림, 그런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따스한 일시적 피난 장소입니다. 누구라도 그곳에 자유롭게 들어가고, 거기서 자유롭게 나오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곳에 말하자면 '개인'과 '공동체'의 완만한 중간 지역에 속하는 장소입니다. 그곳의 어디쯤에 자리를 잡을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량에 맡겨집니다. 우선 나는 그곳을 '개인 회복 공간'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공간이라도 괜찮습니다. 딱히 대규모적인 것이 아니어도 됩니다. 수작업처럼 조촐한 장소에서 아무튼 다양한 가능성을 실제로 시험해보고, 만일 뭔가 잘될 것 같으면 그것을 하나의 모델=발판으로 삼아 좀 더 발전시켜나가면 됩니다. 그런 공간을 점점 확대해나가면 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가장 올바르고 이치에 맞는 방식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 장소가 여러 곳에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났으면 합니다. - 223


어떤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졸아듭니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건 인간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독서를 통해 그것을 배운 것은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습니다. - 225


소설을 쓰려면 무엇이 어찌 됐든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라는 얘기와 동일한 의미에서, 인간을 묘사하려면 사람을 많이 알아야 한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알아야 한다고 해도 상대를 이해하거나 분석하는 선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겉모습이나 언행의 특징 등을 언뜻 눈에 담아두기만 하면 됩니다. 단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솔직히 영 안 맞는 사람도, 가능한 한 가리지 않고 관찰하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자신이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 이해하기 쉬운 사람만 등장시켰다가는 그 소설은 폭이 부족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행동을 취하고, 그런 것이 맞부딪치면서 상황이 굴러가고 얘기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니깐 얼른 한 번 보고 '이 인간은 영 마음이 안 드네'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눈을 돌리지 말고 '어떤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가', '어떤 식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가' 등의 요점을 머릿속에 담아둡니다. - 236


'리얼하고 흥미롭고 어느 정도 예측 불가능한 것' 이상으로 소설 캐릭터에 특히 중요한 것은 나로서는 '그 인물이 얼마나 이야기를 앞으로 끌고 가주느냐' 하는 점입니다. 등장인물을 만든 것은 물론 작자지만, 참된 의미에서 살아 있는 등장인물은 어느 시점부터 작가의 손을 떠나 자립적으로 움직입니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픽션 작가들이 흔쾌히 인정하는 일입니다. 실제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소설을 계속 써낸다는 건 상당히 빡빡하고 힘겨운 작업이 됩니다. 소설이 제대로 궤도에 오르면 등장인물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스토리가 제 마음대로 흘러가고, 그 결과 소설가는 단지 눈앞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그대로 문장으로 받아쓰기만 하는 지극히 행복한 상황이 출현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 캐릭터가 소설가의 손을 잡고 그/그녀가 미처 예상조차 하지 못한 뜻밖의 장소로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 249


내가 작가가 되고 정기적으로 책이 출간되는 동안에 한 가지 몸으로 배운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든 결국 어디선가는 나쁜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긴 소설을 쓰면 '너무 길다.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반으로 줄여도 충분하다'라고 하고, 짧은 소설을 쓰면 '내용이 얄팍하다. 엉성하다. 명백히 태만한 티가 난다'라고 합니다. 똑같은 소설을 어떤 곳에서는 '같은 얘기를 뒤풀이한다. 매너리즘이다. 따분하다'라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전작이 더 낫다. 새로운 시도가 겉돌고 있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미 이십오 년 전쯤부터 '무라카미는 시대에 뒤떨어졌다. 이제 끝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불평을 늘어놓는 쪽에서야 간단하겠지만 그런 말을 듣는 쪽에서는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했다가는 우선 몸이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뭐든 상관없어. 어차피 나쁜 말을 들을 거라면 아무튼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을 대로 쓰자'라고 하게 됩니다. - 269


소설이란 스토리란 남녀와 세대 간의 대립이나 그 밖에 다양한 스테레오타입의 대립을 누그러뜨리고 그 날카로운 칼끝을 완화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기능입니다. 내가 쓴 소설이 이 세계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그런 포지티브한 역할을 해주기를 나 혼자 은근히 바라고 있습니다. - 280


애초에 소설이란 어디까지나 신체의 내측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것이지 그렇게 전략적으로 홱홱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장조사 같은 것을 해서 그 결과를 보고 의도적으로 내용을 분류해가며 써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런 일천한 지점에서 태어난 작품은 수많은 독자의 지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지지를 얻는다 해도 그런 작품이나 작가는 오래갈 수도 없고 금세 잊힙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많은 사람을 짧은 기간 동안 속이는 건 가능하다. 몇몇 사람을 오랜 기간 속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오랜 기간 속일 수는 없다'라고, 소설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시간에 의해 증명되는 것, 시간에 의해서만 증명되는 것이 이 세계에는 아주 많습니다 - 301


내가 생각하기에 소설가의 역할은 단 한 가지, 조금이라도 뛰어난 텍스트를 대중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텍스트라는 것은 하나의 '총체', 영어로 말하면 whole입니다. 말하자면 '블랙박스'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덩어리의 텍스트로서 기능합니다. 텍스트의 역할은 각자의 독자에게 저작되는 데 있습니다. 독자는 그것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풀어서 저작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만일 독자의 손에 건너가기 전에 저자에 의해 풀리고 저작된다면 텍스트로서의 의미나 유효성이 대폭적으로 손상됩니다. 그래서 아마 나는 카를 융을, 가와이 선생님의 저서를, 의식적으로 멀리해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감각적으로 '너무 가깝다'고 느껴지는 면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멀리해왔는지도 모릅니다. 소설가에게는 자신이 자신을 분석하기 시작하는 만큼 부적절한 일도 없으니까요. - 320


이야기=스토리라는 것은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과 사람을 근간에서부터 서로 이어줍니다. 나는 소설을 쓰면서 일상적으로 그 장소에 내려갑니다. 가와이 선생님은 임상가로서 클아이언트와 마주하면서 일상적으로 그곳에 내려갑니다. 혹은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와이 선생님과 나는 아마도 그것을 '임상적으로' 서로 이해했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서로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냄새로 서로를 알아보는 것처럼, 물론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에 가까운 어떤 공감이 있었다고 나는 지금도 분명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 325


한 가지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나는 기본적으로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분명 소설을 쓰는 자질 같은 건 원래부터 약간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점을 별도로 한다면,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도 좀 그렇지만, 나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사람이다. 길을 돌아다녀도 눈에 띄지 않고 레스토랑에 가면 대체로 지독한 자리로 안내해준다. 만일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딱히 주목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극히 당연하게 지극히 당연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우선 나부터 일상생활 속에서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어쩌다 소설을 쓰기 위한 자질을 마침 약간 갖고 있었고, 행운의 덕도 있었고, 또한 약간 고집스러운 성품 덕도 있어서 삼심오 년여를 이렇게 직업적인 소설가로서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직도 나를 놀라게 한다. 매우 크게 놀란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요컨대 그 놀람에 대한 것이고, 그 놀람을 최대한 순수한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는 강한 마음에 대한 것이다. 나의 삼심오 년 동안의 인생은 결국 그 놀람을 지속시키기 위한 간절한 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이 든다. -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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