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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손원평 작가의 장편 소설 '서른의 반격'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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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평 작가의 장편 소설 '서른의 반격'을 읽다



지난 4월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병에 걸린 주인공 선윤재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책 아몬드를 읽고 난 후 저자 손원평 작가의 팬이 됐다. 그녀가 '아몬드'를 쓰기 전 발표한 '1988년생'은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을 수상했는데 그 책이 바로 오늘 소개할 '서른의 반격'이다.

손원평 작가의 장편소설 '서른의 반격'에 나오는 주인공은 단군 이래 우리나라가 가장 호황기로 불렸던 88올림픽에 태어나 학창시절 어느 반에나 한 명쯤 있을 흔한 이름을 가진 김지혜가 사회 생활을 하면서 겪는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다.

김지혜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듯 안정과 높은 월급의 대명사인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아카데미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하지만 하루종일 복사만 하고 정규직도 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낀다.

10개월째 비정규직으로 인턴 생활을 하고 있는 김지혜는 매번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존재하지 않는 정진 씨를 점심시간마다 만나며 자기만의 안식을 찾지만 눈앞에 보이지 않는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사내에서 직원에게 공짜 강의로 제공하던 우쿨렐레 강좌를 듣게 되면서 이규옥과 무인, 남은 아저씨를 만나며 모임을 결성한다.

사회에 불만을 가진 이들은 함께 부조리함에 반항하듯 사건사고를 일으키며 현재의 불만족한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서른의 반격'에 나오는 김지혜는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정답이 없는 시대에 강좌를 통해 알게 된 지인들과 비밀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기도 했다.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며 정규직은 커녕 취업도 힘든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김지혜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내가 현 사회의 부조리함에 목소리를 얼마나 냈을지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나의 모습이 답답하기도 했다.

지난 봄 장편소설 '아몬드' 이후 약 8개월이 지나 손원평 작가의 '서른의 반격'을 읽으면서 또한 느낀 것은 생각을 글로 잘 표현하는 그녀의 필력에 감탄이 나왔다.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것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인데 손원평 작가의 장편소설 '아몬드'나 '서른의 반격'을 읽는 동안 주인공의 생각에 감정이입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이후 손원평 작가가 낼 작품에 기대가 모아진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수술실로 들어가기 직전, 갑자기 신호가 왔다. 엄마는 책에서 본 대로 흡, 하고 짧고 강하게 기합을 넣었다. 흡, 흡, 흡, 세 번 만에 아기가 세상으로 나왔다. 딸이었다. 엄마는 안도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김추봉이 될 뻔했던 나를 꼭 껴안았다. 어쨌든 내가 폐호흡을 시작한 지 몇 시간 만에 쌔근쌔근 잠든 세상의 첫 번째 밤, 엄마의 뒤바뀐 승리를 상징하기라도 하듯, 백 미터 금메달리스트는 벤 존슨에서 칼 루이스로 바뀌었다. 그렇게 눈물겨운 투쟁을 거쳐, 아직 산후 조리도 채 마치지 못한 엄마가 밤을 세우고 옥편을 뒤지며 고심한 끝에 내가 얻게 된 이름은, 88올림픽을 즈음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들 중 가장 흔한 이름인 김지혜가 되었다 - 11

정진 씨를 만들어 낸 건, 이 답답한 도시생활에서 하나의 숨통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언제나 같은 사람들과 밥을 먹는다는 건 정말이지 숨 막히는 일이다. 매일 점심때마다, 뭐 먹을래, 아무거나요, 오늘은 돈가스 어때, 좋아요, 메뉴는 짜장면으로 통일할까, 그러죠, 따위의 대화를 나누는 것. 나서서 냅킨을 깔고 숟가락, 젓가락을 놓고 도맡아 물을 따르는 것, 다들 그런다고 생각하면 어렵지 않지만 그래도, 그래도, 가끔은 도피처가 필요했다 - 34

다시 복사를 시작한다. 이곳에서 나의 역할은 어느 정도일까. 복사기 토너? 나사 정도의 부품? 문득 가느다란 여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딱 봐도, 성실하게 야무져 보이는 여대생이다. 면접 장소가 어디냐고 조심조심 토끼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예의 바르게 묻는다. 나는 손끝으로 면접 장소를 가리켰다. 총총걸음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싱그럽다. 아까 본 이력서 속 경력이 떠오른다. 여기서 일하기에 너무 모자람이 없는 이력이다.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 하나의 모자람이 되어 그녀는 이곳에서 일하지 못할 것이다 - 36

아주 짧은 순간 동안, 그 안에 무언가를 해결해야 한다는, 그러니까 내 인생의 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를 한입 머금고 목구멍 저아래에서부터 스며나오는 불안과 섞어 삼켜버린다. 연예인이 자신의 사업 실패와 바가지 긁는 마누라 얘기를 털어놓으며 눈물 섞인 웃음을 선사하다. 창밖으론 점점 화려해지는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겠지. 어딘가 높은 곳에 사는 누군가의 눈에 분명 그런 그림이 보일 거다. 각자의 창으로 보이는 장면이 조금씩 다른 것뿐 - 37

나는 그의 미련함이 반갑지 않았다. 모름지기 사람은 적당히 일을 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분수에 맞게, 주어진 시간과 급여에 맞게, 그러므로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는 비정규직인 우리에게 일이라는 건 꼼수, 눈치, 요령의 삼 요소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최소한의 노동이여야만 한다. 그래야 헤프게 이용당하지 않고, 당연하 듯 착취당하지 않고, 적당히 치고 빠질 수 있다. 계속 못하다가 갑자기 잘하면 칭찬을 받지만 계속 잘하다가 한 번 실수하면 본전도 못 뽑고 신랄히 욕만 먹는다. 아슬아슬 선을 지키는 수준에서 일하고, 할 수 있는 일도 가끔은 못하는 척 피해 가고, 귀찮더라도 가끔 핀잔을 듣는 상황을 만들어 상사를 우쭐하게 만들 줄도 알아야 한다. 당신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그럭저럭 보통은 해. 가끔 덤벙대기도 하지만 발전 가능성은 있어' 정도면 충분하다. 그게 자신을 지키며 일하는 법이다 - 43

그날 밤, 나는 알딸딸한 정신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온 국민이 광장으로 나갔던 그해 여름의 사진들을 검색했다. 광화문 거리가 촛불로 빼곡히 들어차 반짝이는 광경은 언제 보아도 놀랍다. 빛이 하나하나 모여 알고 있던 세상의 모습을 완전히 뒤바꾸어놓는다. 순수하게 아름답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정말 이랬던 적이 있는 걸까. 그리고 저 수많은 불빛 중 어딘가에 내가 있다는 것일까. 감동이 밀려온다. 짧고 휘발성 강한 감동이, 억울하건 화가 나건, 사람들은 세상에 비일비재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꾸역꾸역 잘도 잊어버렸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잊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아니, 살아지지 않는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그저, 모든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행동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을 선택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고, 통용되는 것들에 대부분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자신 없게, 네, 라고 말해버리는.. 그런 내가 규옥의 제안에 동의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규옥에 대한 이끌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 번쯤은, 단 한 번쯤은 자신있게 외쳐보고 싶어서였을 거다.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고 - 90

너 사람이 언제 어떻게 보수화되는지 알아? 명백한 자기 재산이 생길 때야. 절대 빼앗기거나 침해될 수 없는 것, 집이나 돈이나 그럴듯한 밥그릇이 생길 때. 근데 나한테 그게 얘야. 그런 게 생기면 있지. 이 세상에 갑자기 되게 위험해 보인다? 코웃음 치며 부렸던 객기는 다 증발하고, 교통사고, 전쟁, 사이코패스, 환경호르몬, 미세먼지, 그런 것만 생각하게 돼. 그리고 나는 집 밖의 몹쓸 것들로부터 가족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투사가 되는 거야. 그러다 보면 점점 보수화되지. 나와 다른 세계에서 있는 사람을 이해하기 힘들어지거든. 기본적으로 팔짱 탁 끼고, 걸려봐, 된통 쏘아줄 테니까, 이 마인드야. 왜 이렇게 된 거지? 나도 참 젊은 나이인데, 워홀 갔다가 웜홀에 빠진 줄 알았는데 이젠 블랙홀이다 - 101

해본 적 없는 의문들이 하나둘 꼬리를 물며 떠올랐다. 먹는 모습을 찍어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생각은 누구의 머릿속에서 처음 나온 걸까. 내가 밥을 먹고 있다는 행위조차, 누군가에게 확인을 받아야 비로서 의미가 생기는 걸까. 똥 누는 모습을 감추면서 먹는 행위는 왜 그토록 보여주고 싶어 하는 걸까. 그걸 보고 있는 사람들은 또 무슨 심리일까. 먹고 살기 위해서, 라는 말은 왜들 그렇게 입에 달고들 사는 걸까. 먹기 위해 사는 걸까, 살기 위해 먹는 걸까, 뺨 위로 뜨거운 게 흘러내린 걸 깨달은 후에야 나는 당황해서 창을 껐다. 이런 건 맘에 들지 않는다. 남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도 없으면서 흘려지는 눈물, 달아오른 볼을 두드리고 휴지로 물기를 찍어냈다 - 111

부당한 권위를 이용해 세상을 뻣뻣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대상들이었으며, 그들을 곤란하게 하고 면박을 주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우리에 대한 반응은 한결같았다. 물을 뿌려도 젖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들은 늘 깜짝 놀라면서 당황해했다. 그들의 마음속에 담긴 단어들은 이런 것들인 것 같아싿. 누가, 감히, 나에게, 그래봤자, 너희들이, 어떻게 - 129

간신히 문을 열고 신발을 팽개치듯 벗은 후 화장실로 들어가 헛구역질을 몇 차례 했다. 나오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토하고 싶은데 게워내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니, 세상은 대체 왜 이 모양인 걸까. 이런 사소한 일까지 내 의지대로 행해지지 않는다는 게 갑자기 무척이나 서러워져 나는 엉엉 소리를 내서 울부짖었다. 너무 취해서인지 눈물도 별로 나오지 않았다. 세면대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고개를 들어 거울을 마주 봤다. 서른 살의, 젊다면 젊은 낙오자가 서 있었다. 아니 성공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낙오한 적도 없다. 잘나갔던 적도 없기 때문에 슬럼프라는 말도 사치다. 그저 하루하루 살았을 뿐이다. 내 깜냥만큼, 내 능력만큼, 내 성격이 받쳐주는 딱 그만큼 그게 나였다 - 170

아마 그 고민은 죽을 때까지 하게 될 거예요. 백 살이 될 때까지 같은 생각할걸요. 외롭다고,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내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었느냐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괴롭고 끔찍하죠. 그런데 더 무서운 거는요, 그런 고민을 하지 않고 사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질문을 외면하죠. 마주하면 괴로운 데다 답도 없고, 의심하고 탐구하는 것만 반복하니까. 산다는 건 결국 존재를 의심하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에요.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게 얼마나 드물고 고통스러운지 알아가는 - 179

실연의 상처가 아니라 복합적 괴로움이다. 혹은 비밀스런 죄책감이다. 규옥과의 키스를 그만두었던 그 밤으로 수렴하는 떳떳하지 못한 죄책감, 너는 멋진 사람이지만, 너와는 내 미래를 함께할 수 없다는, 그 알량한 방어기제 내지는 허영심, 내가 함께 하는 행위에 대해 끊임 없이 의심했음에도 부룩하고 말하지 못한 가식, 그걸 거울놀이 하듯 한 때의 동지였던 무인에게서 보게 되는 아이러니, 어쩌면 처음부터 속으로는 알고 있었을 거다. 이런 행위 따위로는 세상을 바꿀 수도, 균열을 일으킬 수도 없다는 걸, 다만 나는 그걸 입 밖으로 내지 못했을 뿐이다. 얕은 진심을 드러내기엔 너무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어젯밤 저 바닥까지 헤집고 쑤신 무인이 나보다는 솔직한 건지도 모른다 - 215

거리의 모습을 똑같았다. 내가 사회적으로 물의가 될 만한 사건을 벌이고 구치소에서 밤을 지새웠다는 건 그 누구의 관심거리도 되지 못했다. 하찮아서 다행이었다. 그 하찮음은 이 세상에 멀어지고 있는 더 끔찍하고 더 슬프고 더 자극적인 일들에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런 일들로 시선이 돌려지기에 평범한 사람들의 드라마는 금세 잊혀지고 만다 - 219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지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 있다고 가끔식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 232



서른의 반격 - 10점
손원평 지음/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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