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를 쓴 저자 카르리네 마르살은 웁살라대학교를 졸업하고 스웨덴의 유력 일간지 '아프톤블라데트'의 편집 주간을 지내며 국제 금융, 정치와 페미니즘에 대한 기사를 주로 썼다. 이후 경제학과 가부장제의 관계를 논한 저서 '유일한 성'으로 2012년 스웨덴에서 유력한 문학상인 아우구스트프리세트의 논픽션 부분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 책을 읽은 이유
평소 경제학, 경영학과 관련된 책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 인터넷을 둘러보다가 경제학과 페미니즘을 주제로 쓴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라는 책을 보게 됐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키워드 중 하나인 페미니즘과 평소 관심 있었던 경제학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손'을 말했던 애덤 스미스의 저녁상은 대체 누가 만들어 줬는지, 그 저녁상이 경제학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면서 이 책을 고르게 됐다.
# 느낀 점
평소 직장 생활을 하거나 인생을 사는 등 우리 인생에서 경제학이란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제 활동 뒤 편에서는 우리 모두를 보살펴주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애덤 스미스가 말한 그 손이 아닌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쓰는 동안 그의 저녁상을 차려준 바로 그 손이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남성과 여성은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차별을 받는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경제학 이론에서부터 여성이 아닌 남성만을 기본 베이스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책을 읽는 동안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평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차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나 역시 차별하거나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이에 따라 페미니즘 사상에 관해 관심을 둔 바 있다. 하지만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여성이 얼마나 불리한지를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심각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경제적 인간'에는 여성을 포함하지 않는다. 우리 역시 학창시절에서부터 배웠던 사회와 경제 과목에서 수많은 사례에서 남성과 여성을 따로 나누지 않는다. 그런한 점에서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는 또 다른 관점에서 경제학을 배울 수 있어 유익했다.
# 줄거리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에서는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남성과 여성의 차별을 합리화하는 경제학자들에 대한 비판을 이야기한다. 또한 경제학이 여성을 무시하는 예와 함께 월스트리트, 현대의 금융 위기, 세계적인 기업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세계 여러나라에서 여성들이 경제학적으로 어떤 차별을 받는지 상세히 말하고 있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경제학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아끼는 방법에 대한 과학이라고 묘사되어 왔다. "사랑은 희소성이 있다"는 것이 이 개념의 기본 전체다. 따라서 사랑은 아껴서 사용해야 하고, 불필요한 곳에 써 버려서는 안 된다. 사랑으로 사회를 움직이면 개인적인 삶에서 사용할 사랑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찾기 어렵고, 유지하기는 더 어렵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경제학자들은 사회를 조작하는 데 사랑 말고 다른 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20
경제학은 돈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경제학은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살피는 학문이었다. 본질적으로, 경제학은 주어진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익을 보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기술하는 역사였다. 모든 상황에서, 결과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이것은 여전히 주류 경제학 이론의 시작점이 되고 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우리가 "경제학자처럼 생각한다"라고 말하면, 보통 '사람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특정 행동을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류가 보여 주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아닐지 모르나, 가장 정확하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이루어 내려면 현실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듣는디ㅏ. 도덕성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으면 좋을지에 대한 우리의 기대치를 표현하고, 경제학자들은 그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야기해 준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데 말한다 - 22
애덤 스미스는 식탁에 앉았을 때 푸줏간 주인과 빵집 주인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교환을 통해 충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애덤 스미스의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른 것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요구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스테이크를 실제로 구운 것은 누구였을까? 애덤 스미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이 경제학의 아버지는 거의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가 집안일을 돌봤고, 사촌이 돈 관리를 했다. 애덤 스미스가 관세 위원으로 에든버러에서 일하게 되자 어머니도 함께 이사했다. 그의 어머니는 평생 아들을 돌봤지만, 저녁 식사가 어떻게 식탁에 오르는지를 논할 때 애덤 스미스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에 속해 있다 - 30
매일 아침 15킬로미터를 걸어가서 식구들에게 필요한 땔감을 모아 오는 11세 소녀는 국가의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 나라의 총 결제 활동을 측정하는 GDP를 계산할 때 그녀는 포함되지 않는다. 경제 성장에도 중요하지 않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정원을 가꾸고, 형제자매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고, 집에서 기르는 소의 젖을 짜고, 친절들의 옷을 만들고,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쓸 수 있도록 돌보는 일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 활동 중 어떤 것도 주류 경제학의 '생산 활동'에 포함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이지 않는 성이 있다 - 31
경제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인다는 믿음은 수 세기에 걸쳐 내려오면서 거의 시장의 역사에 종말을 고할 수 있다는 신화로까지 발전했다. 이 신화에서는 전쟁을 하지 말고, 대신 돈을 벌자고 말한다. 마치 그 두 가지가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인 양, 사람들은 서로의 경제적 이익이 밀접하게 얽히면 과거에 존재했던 원초적 갈등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촌과 경제적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가 이슬람교도라고 해서 총을 쏘지는 않을 것이다. 사업의 성패가 손에 달려 있다면 그가 자신의 딸과 잠자리르 같이했다고 해서 그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런 행동들을 막는다 - 47
여성들이 수천 년 동안 경제적, 정치적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적 영역에서 대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저 우연히 생긴 실수였던 게 틀림없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인간이 될 수 있다. 남성이 독립적이고 자립적 인간으로서 경쟁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여성도 그럴 수 있다. 분명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달리 어떤 형태의 인간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 56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것일 뿐이다. 여성이 집에 머무르면서 아이가 대학에 갈 때까지 돌봐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의 육체에 여성 호르몬이 더 많이 분비된다는 것의 의미는 말 그대로 육체의 여성 호르몬이 더 많이 분비된다는 것이다. 수학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성만의 쾌감만을 느끼기 위해 존재하는 신체 부위를 가졌다는 것의 의미는 여성만이 쾌감을 느끼기 위해 존재하는 신체 부위를 가졌다는 것일 뿐이다. 이사회의 임원으로 일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 61
경제학의 일부가 되고 싶다면 경제적 인간처럼 되어야 한다. 그의 남성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가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것의 뿌리에는 항상 또 다른 이야기가 존재한다. 바로 경제적 인간이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든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가 '이 밖에 다른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만든 모든 것. 그가 이성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감정이 되어야 한다. 그가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육체가 되어야 한다. 그가 독립적이라면 누군가는 의존적이어야 한다. 그가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복종해야 한다. 그가 이기적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적이어야 한다. 애덤 스미스가 저녁 식사에 들어간 노동을 가치 없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를 위해 스테이크를 요리해야 한다 - 66
경제학을 조금도 공부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해가 잘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경제학적 논리'라는 것은 그냥 아무 논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한 거대한 담론'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의 근복적인 동기가 경제적이기 때문에 경제학자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을 어떻게 조직해야 우리의 가장 내적인 본성에 이로운가를 알려 줄 수 있다. 우리의 가장 내적인 본성은 물론 '이익을 거두는 것'이다. 가장 낮은 가격을 찾아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 80
여성은 보수를 받는 고용 시장에 진입했고, 이에 따라 집안일의 많은 부분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커리어 우먼으로 성공하려면 직장에 출근할 때 집안일은 버려 둬야 했다. 이제 능력을 발휘할 시간, 그리고 이기적이 되어야 할 시간이다. 모든 걸 바쳐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대체 무엇을 어디에 바친다는 말인가? - 92
경제학자들은 남성이 자기 가사 도우미와 결혼하면 그 나라의 GDP가 감소하고, 자기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면 GDP가 상승한다고 농담을 하곤 한다. 농담이기는 하지만 경제학자들이 성 역할을 보는 관점에서 잘 나타는 예다. 이처럼 똑같은 일이 어떤 때는 GDP에 포함되고 어떤 때는 포함되지 않기도 한다. 결혼한 여성들이 노동 시장에 투입된 후, GDP에 포함되는 일을 하는 시간이 늘고, 그러지 않는 일에 들이는 시간이 줄었다. 이에 따라 서구에서는 GDP가 극적으로 증가했다. 이 증가치는 정확한가? 그동안 아무도 가사노동을 경제적으로 환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의 증가분을 실제보다 더 높이 평가했을 수도 있다. 사실 세탁기, 전자레인지, 믹서 등의 보급으로 가사노동에 들이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이 증가분이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실상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 94
어머니가 되면 모든 것이 충돌한다. 서로 분리돼야 할 공적 영역과 사정 영역이 갑자기 한데 섞인다. 출근할 때 버려두고 온 사적인 자아 곁에 임신한 배까지 두고 나오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보수를 받고 일하는 직장에 가정의 흔적을 가지고 가야만 한다.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 이상의 그 무엇을. 그것은 그녀도, 보수 노동의 세계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부분이다. 경제적 인간은 모유가 나오는 가슴도, 호르몬도 없다. 그에게는 육체가 없다. 아기가 그의 어깨에 토한 적도 없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 100
세계 주식시장이 한 번 출렁이고 나면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 수백만 명의 실업자는 한 나라의 재정 적자를 초래하고, 정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노인들의 복지 예산을 줄여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먹이고, 간호하고, 손을 잡아 줘야 하는 노인들의 수는 변함없다. 더 적은 수의 간호사들이 같은 양의 일을 나눠서 해야 한다. 그들의 허리와 관절이 버텨 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금융 카지노에서 눈 깜짝할 사이의 가격 변화에 거는 도박의 실수가 낳는 여파는 어느 간호사의 왼쪽 무릎 상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애덤 스미스나 금융계의 우두머리들이 계산을 넣겠다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바로 그 무릎 말이다 - 139
300마이크로초 만에 온 세상을 열두 번 샀다 팔았다 할 수 있는 컴퓨터 시스템을 만들어 낼 능력이 있든 없든, 수학 모델의 우아함이 얼마나 유혹적이든, 경제학의 핵심은 인간의 육체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을 하는 인간의 몸, 누군가를 돌보는 몸, 다른 몸을 만들어 내는 몸, 태어나고 나이 들고 죽어 가는 몸, 성별이 있는 몸, 인생의 여러 단계를 거치는 데 많은 도움이 필요한 몸 말이다.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회 말이다 - 141
애덤 스미스는 사랑을 병에 담아 보존하고 싶어 했다. 경제학자들은 그 병에 라벨을 붙이고 '여성'이라고 썼다. 내용물은 다른 것과 절대 섞이면 안 되었고, 자물쇠가 달린 장에 잘 보관되어야만 했다. 이 '또 다른 경제'는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간주됐다. 사실이건 경제도 아닌, 전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마르지 않는 천연자원이었다. 후에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들은 이 '또 다른 경제'가 부의 창출과 전혀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가정과 결혼 생활에도 시장 원칙을 적용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과 돌봄의 손길을 진정으로 사회 안에서 보존하기를 원했다면, 그것을 제외하는 대신 돈과 자원을 들여 지원하려 노력했어야 한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 위주로 경제를 구축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를 선택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경제에 대한 개념에 끼워 맞춰 인간을 새롭게 정의했다 - 188
"신은 모든 이와 함께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가장 돈이 많고 가장 큰 군대를 가진 사람들을 선택한다" 프랑스 극작가 장 아누이의 말이다. 경제적 인간은 이러한 세상의 주인공이다. 그는 이 세상에 영감을 주고, 이 세상을 합리화하는 존재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은 자신을 설명하고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 즉 부자들은 더 큰 부자로 만ㄷ르면 우리 모두에게 이득이라는 논리 말이다. 신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경제적 인간은 우리에게 다른 가능성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경제적 인간처럼 행동하는 한 다른 어떤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207
경제적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애덤 스미스가 상상한, 다른 사람과 교환을 하는 존재가 아니다. 경제적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는 장치다. 은행 강도짓을 하거나, 의대를 그만두거나, 치아 미백 시술을 받는 것, 이 모든 게 기업 경영 과정에서의 선택과 동일한 종류의 선택이고, 미래의 손익을 잘 따져 내린 결정이다. 자신에 대한 투자가 성공적인지 아닌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경제 체제는 인간의 본성과 동의어가 되었다. 그러나 누가 우리의 본질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는가? 마르크스가 언급했던 갈등은 해소됐다. 그러나 그가 상상했던 방식으로 해소된 것은 아니다. 생산 수단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가 변해 버린 것이다 - 220
주류 경제학 모델이 내세우는 인간에 대한 가정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는 30년도 넘었다. 경제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현실에서는,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에게 매달린다. 그에 대한 비판이 아무리 게서도 그는 여전히 경제학과 동의어로 통하고, 우리의 삶처럼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연구 결과는 어떻든 상관없는 듯하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경제 모델이 아무리 세계경제를 빈번하게 파탄으로 몰아넣어도 상관없는 듯하다. 그런 모델들이 아무리 반복적이고 시장의 팽창과 공황, 변덕을 예측하는 데 실패해도 상관없는 듯하다. 우리는 여전히 그를 놓지 않는다 - 229
경제적 인간을 소리 높여 면밀히 비판하는 경제학자들은 항상 존재했다. 그러나 경제적 인간은 여전히 경제학과 동의어로 간주된다. 일상생활에서 '경제학적 논리'를 말할 때 늘 경제적 인간이 등장하고, 그를 반대하는 수많은 비판은 고작해야 보완적인 의견으로 치부된다. 무대의 중앙을 차지하는 것은 경제적 인간이고, 누구나 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야만 한다 - 230
남성은 이성이었고 여성은 감성이ㅓㅆ다. 남성은 두뇌, 여성은 신체, 남성은 독립, 여성은 의존, 남성은 능동, 여성은 수동, 남성은 이기적, 여성은 자기희생적, 남성은 견고함, 여성은 부드러움, 남성은 계산적, 여성은 예측 불가능, 남성은 합리적, 여성은 비합리적, 남성은 고립된 존재, 여성은 다른 것과 연결된 존재, 남성은 과학적, 여성은 마술적, 남성은 우리에게 목숨을 바칠 만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여성은 삶을 바칠 만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것이 우리가 수행해야 할 역할이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춤 동작이다. 이것이 정말로 한낱 춤동작에 지나지 않았다면 좋았을텐데 - 239
경제학의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합리적이고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개인이다. 이런 특징들은 전통적으로 늘 남성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을 중성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특징에 성별은 규정되지 않는다. 남성은 한 번도 두 성별 중 하나로 구분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인간은 유일한 성이다. 동시에 경제적 인간을 탄생시킨 이론에서는 돌봄과 사려 깊음, 외존을 상징하는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경제학 이야기에 포함되기를 원하면 경제적 인간처럼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늘 따로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경제적 인간이 그 자신에게 존재하기 위해 삭제될 수밖에 없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이 덕분에 경제적 인간은 자신 말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 243
우리는 경제적 인간을 통해 불안감으로부터 도피한다. 모든 것이 확실하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다. 공의 부피는 아주 작은 정사각형으로 나누고 나눠서 계산해 낼 수 있다. 삶도 그런 식으로 계산할 수 있다. 인간의 이동과 그런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힘도 마찬가지다. 모든 일의 추상적인 벌칙에 의해 움직인다.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는 약함으로부터 도피한다. 우리는 고개만 까딱해도 우리 마음대로 움직여 주는 우주의 주인이다. 경제학의 이야기에서는 것만이 세상이 가진 유일한 기능인 것처럼 보인다. 시장은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가치 없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가치 있는 사람들 앞에 굴복한다 - 254
우리가 만들어 낸 경제 언어로는 전체에 관해 이야기하기가 불가능하다. 우리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인간뿐이다.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그녀를 경제적 인간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조각, 그림, 그리고 심지어 그것들을 볼 때 느끼는 감정마저도 시장의 재화로 만들어야만 한다. 우리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이를 경쟁 관계로 만들어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어떤 현상이 모델에 들어맞지 않으면, 흠, 그건 모델의 문제가 아니라 그 현상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그가 여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제학의 성별은 한 가지다. 여성은 그처럼 되려고 노력하거나 그와 반대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그의 합리성과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가진 견고한 논리를 보완하고 균형을 잡아 주는 쪽, 여성이 스스로 그쪽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자유 의지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261
어떤 종류의 립스틱을, 누구를 위해, 어떤 색으로, 얼마 정도의 가격으로 생산할지 결정할 때는 시장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 아주 좋다. 그러나 미국의 풍자 비평가 H. L. 멩켄은 양배추보다 장미의 향기가 더 좋다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장미로 더 맛있는 수프를 만들 수 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논리를 시장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장 논리가 어떤 부분에 잘 맞아떨어진다고 해서 모든 것에 다 적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시장 논리를 모든 것에 적용하는 것이 최근 몇십 년 동안 경제학자들을 사로잡은 가장 큰 프로젝트가 되었다. 우리가 경제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공식적인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 즉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왜 존재하며, 우리가 왜 일을 하는지를 밝히는 이야기가 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경제적 인간이다. 그리고 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가 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 268
무엇이 의존이고 누가 누구에게 기생해서 사는가를 결정한느 것은 항상 정치적인 문제였다. 애덤 스미스가 어머니를 필요로 하는가, 어머니가 애덤 스미스를 필요로 하는가?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존한 채 살아가고, 따라서 사회는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우리 자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항상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이야기할 매체가 필요하다. 현재의 경제학에 인류의 현실적인 경험을 위한 자리는 없다. 주류 경제학 이론은 허구의 인물, 여성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인물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보통 사람들은 경제학자들이 당연히 인류가 직면한 바로 이 굉장히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 골몰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심지어 남성마저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 남성적 특성에 대한 가정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세상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 282
우리의 관계는 경쟁으로만 한정할 필요가 없다. 자연을 적대적인 상대로 간주할 필요도 없다. 모든 부분을 합친 것보다 전체가 더 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은 기계 혹은 정교한 기게적 움직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경제적 인간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헛되다 느낄 수 있는 상황은 많지만 이 문제만큼은 헛되다 외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정의 목표는 바뀔 수 있다. 세상을 소유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편안하게 살려고 애쓰는 여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소유는 집착이다. 죽은 물건을 손으로 감싸고 "이건 내 거야"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반면, 세상을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은 무엇이 자기 것이라고 선언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우리는 신발을 벗는다. 한동안 그곳에 머무를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에 - 286
2008년 대규모 금융 위기는 이를 초래한 경제 사상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지 않은 채 지나갔고, 모두 그런 위기는 불가피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은행들은 무너졌지만 사상은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 이 책에서는 경제적 인간이 우리를 얼마나 완벽히 유혹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도 그런 일이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패미니즘 없이는 경제적 인간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고, 경제적 인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서는 중요한 것을 변화시킬 수 없다. 마거릿 더글러스는 퍼즐에서 빠진 조각이다. 그러나 빠진 조각을 찾았다고 해서 항상 해결책이 명확히 보이는 것은 아니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은 경제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진실 중 하나다. 여기에 한 가지 꼭 덧붙여야 한다. 바로 "공짜 돌보기는 없다는 말이다 - 292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부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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