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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1권 역시나 하루키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가 독서에 관심을 가졌던 20대 초반부터 집에 있던 책장에서 우연히 발견하면서 빠져들었는데 그의 편안하면서도 알기 쉬운 문체가 마음에 끌렸다. 무엇보다 자극적이면서 자극적이지 않은, 작품부터 에세이까지 하루키식 문체 덕분이었는지 이제껏 그가 쓴 책이라면 대부분 구매해 읽어봤다.
이번에 나온 '기사단장 죽이기'는 초상화가인 주인공이 아내와 이혼한 후 자택을 떠나 친구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아버지 집인 아마다 도모히코의 자택에 살면서 시작된다. 이후 그곳에 있던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일본화를 발견하면서 여러 사건이 일어난다.
주인공은 아마다 도모히코의 집에 머무는 도중 근처에서 사는 이웃인 멘시키 와타루의 초상화 작업 의뢰를 받게 된다. 초상화 작업을 하기 전 항상 의뢰인과 대화를 나누는 주인공은 그에게 특별함과 호기심을 느끼게 되고 이후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을 함께 마주하면서 그와 더욱 돈독해진다.
시간이 흘러 멘시키는 주인공에게 자신의 친딸인지도 모르는 아키카와 마리에의 초상화 작업까지 의뢰하는데 이 부분에서 1권의 이야기가 끝난다. 1권만 무려 565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임에도 하루키만의 문체가 전혀 지루하지 않고 계속해서 읽고 싶어질 정도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과거 일본 제국이 저지른 난징 대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기사단장 죽이기'에 담았는데 일본 역사에 문외한 나 역시 이 책을 읽는 동안 '시간'에 대해 자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난징 대학살이 어떻게 발생한 사건인지 알고 싶어질 정도였다.
'기사단장 죽이기' 1권을 읽는 동안 일본화 '기사단장 죽이기' 속 비밀과 멘시키의 정체, 방울을 통해 나타난 이데아인 기사단장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궁금해졌다. 2권에서 그 모든 수수께끼가 밝혀지길 바란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그저 짧은 꿈 같기도 했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만일 그게 꿈이라면 내가 사는 이 세계가 모조리 꿈이라는 뜻일 테니까. 언젠가 무의 초상을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화가가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완성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러러면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 12
내가 원해서 이런 화가, 이런 인간이 된 건 아니다. 그저 이런저런 사정에 휩쓸리다보니 어느새 스스로를 위한 그림은 그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결혼하고 생활의 안정을 고려해야 했던 것이 하나의 계기였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사실 그전에 이미 '나를 위한 그림'을 그리려는 의욕이 식었던 것 같다. 결혼생활은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청년이라 할 수 없는 나이였고, 갈수록 무언가가 내 안에서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 열기가 온몸에 덥히던 감촉이 점자 잊혀갔다. 어느 시점에서 그런 나 자신을 깨끗이 인정하고 단념했어야 옳다. 무언가 수단을 강구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계속 미루기만 했다. 결국 나보다 아내가 먼저 단념했다. 그때 나는 서른여섯 살이었다 - 28
어쩌면 그렇게 낙관적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내 시야에 타고난 맹점 같은 부분이 있는 게 틀림없다. 항상 무언가를 보지 못하고 놓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어디서든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 53
변명은 아니지만, 그때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올바른지 판단할 여유가 없었다. 그때 나는 나무토막을 붙들고 물이 흐르는 대로 떠내려갈 뿐이었다. 주위는 칠흑같이 어둡고 하늘에는 별도 달도 없었다. 죽어라 나무토막을 붙들고 있는 한 익사는 면할 수 있지만, 내가 어디쯤 있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내가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제목의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을 발견한 것은 그 집에 오고 몇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 한 폭의 그림은 나를 둘러싼 주위 상황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 75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믿을 수 없이 갑작스러운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굴곡진 전개가 넘쳐난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진행되는 동안에는 대부분 아무리 주의깊게 둘러보아도 불가해한 요소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쉼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 94
이치에 맞건 아니건, 최종적으로 어떤 의미를 발휘하는 것은 대개 결과뿐일 것이다. 결과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실재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 결과를 가져온 원인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원인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거야' 하고 남에게 보여주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물론 원인은 어딘가에 남에게 보여주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물론 원인은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달걀을 깨뜨려야 오믈렛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장기튀김처럼 하나의 장기짝(원인)이 먼저 옆에 있는 장기짝(원인)을 넘어뜨리고, 넘어진 장기짝(원인)이 다시 옆에 있는 장기짝(원인)을 넘어뜨린다. 그것이 연쇄적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사이 가장 먼저 일어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대개 흐릿해져버리는 것이다. 혹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지거나, 혹은 딱히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거나, 그리하여 '어쨌든 많은 장기짝이 연달아 넘어졌답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도 어쩌면 그와 비슷한 길을 걸을지 모른다 - 95
그때까지 나는 솔직히 일본화는 비교적 정적이고 양식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미술의 포름이라고 인식했다. 일본화의 기법과 화구는 강렬한 감정 표현에 적합하지 않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나와는 전혀 연이 없는 세계라고, 하지만 아마다 도모히코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보자 그것이 나만의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아마다 도모히코가 그려낸, 두 남자가 목숨을 걸고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광경에는 보는 이의 마음을 밑바닥까지 뒤흔드는 것이 있었다. 이긴 자와 패배한 자, 찌른 자와 찔린 자, 그 낙차가 내 마음을 빼앗았다. 이 그림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 109
동생이 죽고 한동안 그애의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내 기억 속에 있는 얼굴들을 여러 각도에서 스케치북에 재현했다. 물론 동생의 얼굴이 잊힐 리 없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애의 얼굴을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 시점의 내가 기억하는 그애의 얼굴을 잊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구체적인 형태로 그려서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나는 아직 열다섯 살이었고, 기억에 대해서나 그림에 대해서, 또한 시간이 흘러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지는 못했다. 그래도 현재의 기억을 고스란히 보존하려면 어떤 방책도 강구해야 한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냥 내버려두면 곧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아무리 선명한 기억일지라도 시간의 힘은 그보다 훨씬 강력하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 186
내가 멘시키라는 사람을 알게 되고, 그 결과 이렇게 대대적인 '발굴'을 하게 된 것은 정말로 우연히 일어난 일일까? 단순한 우연의 산물일까? 이야기가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미리 정해진 시나리오 같은 게 존재했던 건 아닐까? 그렇게 갈 곳 없는 몇 가지 의문을 가슴에 품고서 나는 멘시키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멘시키는 땅속에서 꺼내온 방울을 쥐고 있었다. 그는 걷는 내내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감촉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어내려는 것처럼 - 285
우리가 부부관계를 정식으로 끝낸 뒤에도 친구로 지낸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부로 지낸 육 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아주 많은 것을 공유했다. 많은 시간, 많은 감정, 많은 말과 많음 침묵, 많은 고민과 많은 판단, 많은 약속과 많은 포기, 많은 열락과 많은 권태, 물론 서로 입 밖에 꺼내지 않고 속에만 품고 있던 비밀도 없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숨기는 것이 있다는 감각까지도 제법 현명하게 공유해왔다. 거기에는 시간만이 배양할 수 있는 '자리의 무게'가 존재했다. 우리는 그런 중력에 요령 있게 몸을 맞추고, 미묘한 균형을 잡으며 살아왔다. 또한 우리의 독자적인 '로컬 룰' 같은 것도 몇 가지 있었다. 그것을 모조리 없던 셈 치고, 그곳에 존재하던 중력의 균형이나 로컬 룰을 배제하고서, 그저 단순한 '좋은 친구' 따위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 305
숲의 정적 속에서는 시간이 지나고 인생이 흘러가는 소리마저 들려올 것 같았다. 한 사람이 가고 다른 사람이 온다. 한 생각이 가고 다른 생각이 온다. 한 형상이 가고 다른 형상이 온다. 나 자신조차 반복되는 나날 속에서 조금씩 무너졌다가 재생된다. 무엇 하나 같은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은 상실된다. 시간은 내 등뒤에서 조금씩 죽은 모래가 되어 무너지고 사라진다. 나는 그 구덩이 앞에 앉아 시간이 죽어가는 소리에 마냥 귀를 기울였다 - 369
'기사단장 죽이기'에 등장하는 '기사단장'은 나치 고관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그림은 1938년 빈에서 일어나야 했던 암살사건을 가상으로 묘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다 도모히코와 그의 연인은 사건에 관련되어 있었다. 계획이 당국에 발각되어 두 사람은 헤어졌고, 아마 그녀는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그는 일본에 돌아온 후 빈에서의 통절한 체험을 보다 상징적인 일본화의 필치로 옮겼다. 즉 천 년 전 아스카 시대의 정경으로 '번안'한 것이다. 짐작건대 '기사단장 죽이기'는 아마다 도모히코가 자기 자신을 위해 그렸던 작품이리라. 그는 청년 시절의 무자비하고 참혹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를 위해 그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림을 완성하고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단단히 포장해 자기 집 천장 위에 감춘 것이다 - 471
흡사 물에 소쿠리를 뛰우려는 짓이나 마찬가지야. 기사단장은 말했다. 구멍 숭숭 뚫린 물건을 물에 뛰우는 건 누구에게나 의미 없는 짓이지 - 513
어찌 보면 나는 확실히 떠내려가는 빙산에 남겨진 고독한 백곰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주위에 우체통 같은 건 없다. 백곰에게는 어딘가로 편지를 보낼 수단이 없는 것이다 - 557
기사단장 죽이기 1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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