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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애호가들 정연수 작가의 단편소설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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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단편소설 '애호가들'을 쓴 저자 정연수 작가는 1983년 서울생으로 지난 2014년 단편소설 '레바논의 밤'으로 창비 신인 소설상을 수상한 바 있다.


# 줄거리·느낀 점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기보단 어느 순간 잊힐 때가 있다. 단순하게 읽을 문학 작품이 아닌 지식서를 읽었기에 그랬던 것일까? 머리를 비우기 위해 가볍게 읽을 국내 작가의 소설을 찾다가 평소 호감 있던 출판사인 창비에서 추천한 정연수 작가의 소설 '애호가들'을 알게 됐다. 커다란 소라가 가지런히 놓인 표지에 이끌려서인지 오랜만에 남성 작가의 작품을 읽을 수 있어서인지 어느새 '애호가들'은 내 손에 담겨 있었다.


'애호가들'은 정연수 작가가 그동안 '창작과비평'이나 '악스트'에 발표한 총 여덟 개의 단편소설이 담겨 있다. 사실 단편소설은 보통 함축적인 내용이 많이 담겨 있고 한 번 읽어서는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어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다. 책을 읽다가도 이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해가 어렵기 때문이다.


'애호가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이 책에 담긴 여덟 개 작품의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다. 이는 단편소설에 나온 주인공들은 교제하다 헤어진 연인과 우연한 계기로 다시 만나는 것인데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해피엔딩도 배드엔딩도 아닌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가듯 끝맺는다.


아마도 우리의 인생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살다 보면 정말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해피엔딩이나 배드엔딩이 아닌 예상치 못하게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다음을 기약하며 안녕을 보내지도 못한 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은 누구나 겪는 일상이 아닐까.


정연수 작가의 '애호가들' 속 단편소설들은 막상 읽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작품 속 주인공이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정확하게 알기란 어렵다. 지금에야 생각해보면 아마 그게 맞는 게 아닐까. 타인의 인생을 모두 다 알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책을 읽다 보니 그동안 인연을 맺고 유유히 흘러간 지난 인연이 떠오른다. 그들이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한때 우리가 함께 이야기했던 삶과 비슷하게 살고 있을지 아니라면 이후에 만난 인연으로 다른 삶을 사는 것인지, 그래도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안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였기를.


# 기억하고 싶은 구절


책장을 넘기다보면 언젠가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공부를 계속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정작 책장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언제나 그뒤엔 죽은 것들이 있었으니까. 살아 있는 것들을 바깥에 있고 이 안에는 늘 죽은 것들이 있었다 - 13


구덩이를 다 메우고 나서 적당히 주변을 정리한 뒤 나무둥지에 기대앉아서 숨을 도렸다. 연희가 앉아 있던 곳이었고 나는 거기에서 조금  전까지 구덩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나뭇가지와 돌을 적당히 흩어놓으니 방금 무언가를 파묻은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시체는 사라졌고 장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남은 것은 내 손에 들린 녹슨 삽 한자루뿐이었다. 나는 삽을 나무에 기대어놓았다. 산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매미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31


나는 희곡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모든 희곡에는 미친 사람이 등장하지 않을까. 아니면 사실 모든 문학 작품에는 미친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했다. 그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하나는 사람들이 미치지 않고 이토록 긴 삶과 반복되는 매일을 견뎌내는 것이 너무나 놀랍다고 말했다. 자신은 이제 겨우 열여덟살이지만 이미 백년은 산 것 같다는 것이다 - 72


우리의 삶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상 모든 것이 우연이기 때문에 우연이라는 단어 자체가 정말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세상이 생겨난 이래 일어난 모든 일은 우연이다. 이 간결하고도 명백한 명제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하필 그날, 그곳에서 선영이를 만나게 된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우연이라 불리는 예측불허의 상황 충돌을 넘어선,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었다. 키노꾸니야 서점에서 선영을 만나다니, 게다가 우에노도 아니고, 아끼하바라도 아닌, 이께부꾸로점이라니 - 86


나는 그떄까지 그렇게 거대한 육상 포유류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신화 속 존재 같았다. 안내판을 보니 그 동물은 신생대에 존저했던 인드리코테리아움이라는 이름의 거대 포유류였는데 무리 생활을 했던 동물이라고 쓰여 있었다. 삽화를 보니 말도 아니고, 사슴도 아니고, 기린도 아닌, 머리는 얼핏 코뿔소를 닮았지만 뿔은 없고 체형 또한 완전히 다른, 난생처음 보는 괴상한 동물이었다. 그런 이상하고 거대한 생물이 수십마리씩 몰려다녔다니 - 104


나는 그녀가 충분히 오랫동안 그 생물을 바라보기를, 그것이 살아 움직였던 머나먼 과거를 상상해보기를, 그것의 호흡을 느끼기를 기대하면서 아무 대답도 않고 함께 옆에 서 있어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인드리코테리움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만큼 그 생물을 보고 전율을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들도 자기들이 영원한 줄 알았겠지?" - 113


나는 경험을 통해 지루함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외할아버지의 부고를 들었을 때 나는 사방이 꽉 막힌 작업공간에서 지루한 노동을 반복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시기에 나는 매 작품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그리스비극을 머릿속으로 암송하며 매일매일 끊어질 듯한 숨을 연장하고 있었다.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루함이라는 괴물에 잡아먹혔을 것이다. 잘근잘근 씹히고, 짓이겨지고, 꿀꺽 삼켜지고.. 아니, 나는 사실 매일 죽었다. 극한의 지루함이 나의 영혼에 경련을 일으키고 심장을 쥐어짰다. 지루함은 권태와 다르다. 권태가 아주 천천히 목을 졸라오는 그림자 같은 거라면 지루함은 역설적이게도 순식간에 몸을 잘라버리는 기요띤 같다 - 126


나는 그 이야기가 정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중요한 문제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 이야기를 하필 지금, 내게, 왜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 187



애호가들 - 10점
정영수 지음/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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