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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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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본 서평에는 소설 속 줄거리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2009년 20대 초반 한창 책 읽기를 시작했을 때는 일본 작가가 쓴 소설을 많이 읽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접했던 작가는 히가시노 게이고, 요시모토 바나나, 나쓰메 소세키 등이 있었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1Q84'를 처음 읽을 때부터 팬이 됐다.

 

이후 그가 쓴 소설이든 에세이든 상관없이 출간만 하면 예약구매를 해서 읽었고 블로그를 통해 줄거리와 서평으로 흔적을 남겼는데 지난 달에는 신작 소설 '도시와 그 확실한 벽'을 출간해 똑같이 내돈내산으로 사서 완독했다.

 

총 3부로 나뉘어진 '도시와 그 확실한 벽'은 하루키가 1980년 당시 문예지 '문학계'에서 발표했던 중편소설로 분량을 사백자 원고지 150매 정도였다고 한다.

 

문예지에서 공개한 이후 책으로 출간하려고 했지만 당시의 그는 소설가로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본인 스스로 만족할 만한 필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작품만 공개했다가 43년 만인 2023년이 되어서야 발표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소설 '도시와 그 확실한 벽'에서는 열일곱 살인 '나'와 열여섯 살인 '그녀'가 나온다. 1부부터 3부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은 '그'는 열여섯 살 소녀를 좋아했고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그'를 좋아한다.

 

하지만 1년 후 '그녀'는 "하나도 빠짐없이 네 것이 되고 싶어", "너와 하나가 되고 싶어. 정말이야"라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지게 되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높이 8m으로 둘러싸인 꿈 도서관을 찾아가게 된다.

 

'도시와 그 확실한 벽' 1부 에서는 총 26개의 챕터를 통해 현실 세계의 '나'와 벽으로 둘러싼 세계 속의 '나'가 차례대로 나온다.

 

1부만 읽었을 때는 소설 줄거리가 바로 이해되지 않아 조금은 따분한 감이 있었는데 2부가 시작되고 꿈 도서관에서 '그녀'와 함께 그림자(우리가 아는 그 그림자)가 나오면서 몰입감을 높인다.

 

비록 꿈 도서관에 있는 '그녀'와 현실 세계의 '그녀'는 외모가 같음에도 다른 사람이지만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에 자신의 그림자의 요청을 거절하고 도서관에 남으려고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되면서 '그녀'를 만나지 못했고, 23년이라는 시간 동안 기다리며 출판유통사에서 근무를 하다가 대학 3년 후배인 오키를 통해 후쿠시에 있는 Z** 마을 도서관에서 도서관장으로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소에다 사서와 함께 전 도서관장인 고야쓰 다쓰야를 만나게 되고 기이한 상황들이 계속해서 발생하는데 시계 바늘이 없는 시계탑을 보거나 사과나무로 장작을 때는 도서관 내 반지하방을 만나게 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줄거리가 이어지는 동안 고야쓰 다쓰야 전 도서관장을 통해 꿈 도서관을 다시 언급하게 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도서관장은 이미 죽은 유령이었고 주인공과 소에다 사서 앞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도서관에서 도서관장으로 업무를 맡는 동안에는 자주 방문했던 카페 여성 사장을 만나 데이트를 하지만 이미 어린 시절 '완벽한 사랑'을 했던 그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3부에서 주인공은 도서관에서 태어난 날의 요일을 바로 알아맞히며 한 번 읽은 책은 다 기억하는 능력을 가지고 비틀즈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노란 잠수함인 옐로 서브마린 자켓을 입은 M** 소년에서 알게 되고 그 소년과 함께 그녀가 있는 꿈 도서관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M** 소년과 하나가 되며 꿈 도서관에 있는 꿈 읽기 작업을 시작하지만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려고 하면서 모든 줄거리가 끝나는데 10대 당시 만났던 그녀를 한 평생 동안 잊지 못하는 한 남성의 감정과 심리를 말해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상력과 필체를 보면서 다시금 대단한 작가라 생각이 들었다.

 

총 761페이지의 분량을 자랑하는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면서 초반에는 집중이 되지 않아 모든 줄거리와 등장인물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100% 이해하진 못했지만 낮은 집중력으로 장시간 책을 읽기 못하는 나조차도 푹 빠지게 만들었기에 독서의 계절인 가을철을 맞아 읽을 만한 소설을 찾는다면 추천해주고 싶다.

 

 

* 기억하고 싶은 구절

 

나 역시 계속 침묵을 지킨다. 그저 그곳에 앉아 그녀의 슬품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 경험은 난생처음인지도 모른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슬픔을 오롯이 받아들인다는 건, 누군가가 그 마음을 고스란히 내 맡긴다는 건,

 

내가 좀더 강하면 좋을 텐데. 좀더 힘주어 너를 안고 좀더 믿음직한 말을 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단 한 마디로 그 자리에 걸린 나쁜 주문을 확 풀어버리는, 올바르고 적확한 말을.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직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 사실을 슬프게 생각한다 - 88

 

벽 안에 사는 사람들은 벽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벽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벽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게 원칙이다. 도시로 들어오는 사람은 그림자를 지녀서는 안 되고, 벽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은 그림자를 지녀야 한다.

 

문지기도 도시 주민의 일원이니 그림자가 없지만, 직무상 필요에 따라 벽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허용된다. 그러므로 그는 도시 외곽에 펼쳐진 사과나무 숲에서 사과를 양껏 따서 먹을 수 있었다 - 130

 

그 도시에 가면 나는 진짜 너를 가질 수 있다. 그곳에서 너는 아마 전부를 내게 줄 것이다. 나는 그 도시에서 너를 갖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리라.

 

그곳에서 너의 마음과 너의 몸이 하나가 되고, 유체기름 램프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나는 그런 너를 품에 꼭 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바였다 - 134

 

그렇게 나는 너에 대한 모든 단서를 잃고 만다. 아무래도 너는 나의 세계로부터 소리 없이 퇴출된 모양이다.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설명다운 설명도 없이, 그 퇴출이 너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불가항력이 작용한 결과였는지는 모른다. 남은 것은 침묵과 선명한 기억과 이뤄질 수 없는 약속뿐이다.

 

쓸쓸한 외톨이로 보낸 여름이었다. 나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쯤이면 지구의 중심에 닿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내려간다.

 

주위 공기와 밀도와 중력이 점점 바뀌어가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뭐 어쨌다는 건가? 고작해야 공기 아닌가, 고작해야 중력 아닌가? 그렇게 나는 더욱 고독해진다 - 172

 

나는 두 가지 생각 사이에 서 있다. 이 도시 도서관에서 매일 너의 얼굴을 보고, 유체기름 램프가 밝혀주는 빛 아래에서 함께 꿈 읽기 작업을 하는 행복, 소박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너와 이야기하고, 네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약초차를 마시는 즐거움.

 

매일 밤 일이 끝나고 너의 집까지 나란히 걸어가는 한때, 그것의 어디까지가 실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이 도시는 그런 기쁨을, 가슴 떨림을 내게 안겨준다.

 

또하나는 벽 바깥의 세계에서 경험한 너와의 교류, 그리고 그것이 내 마음에 남기고 간 또렷한 기억이다. 너와 만난 작은 동네 공원, 소녀들이 타던 그네의 리드미컬한 삐걱임, 너와 함께 들은 바다와 파도 소리, 두툼한 편지 다발과 거즈 손수건 한 장, 은밀한 입맞춤, 그것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현실에서 똑똑히 일어났던 일이다.

 

아무도 내게서 그 기억을 빼앗을 수 없다. 어느 세계에 속해야 할까? 나는 아직 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 179

 

대체 왜일까, 나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내가 고야쓰 씨 후임으로 이 도서관에 온 사실을 정말로 알차채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이유가 있어서 나를 '존재하지 않는' 셈 치고, 무시하고 묵살하려고 마음먹은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 그럴싸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하긴 지금 당장 현실적으로 불편한 것도 아니다. 고야쓰 씨와 소에다 씨의 도움을 받아 나는 순조롭게 업무 요령을 익혀가고 있다.

 

그러니 '뭐 어때. 곧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겠지'라고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고야쓰 씨 말마따나 모든 것이 차차 선명해질 것이다.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흘러드는 것처럼 - 296

 

그 도시에 대해 잘 기억나지 않는 것들은 그 외에도 많았다. 어떤 건 지나칠 만큼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어떤 건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다. 눈신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것 중 하나다. 그렇게 기억이 띄엄띄엄하다는 사실이 나를 혼란에 빠트렸다.

 

시간이 경과되면서 기억을 잃은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기억하는 것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일까? 어디까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어디부터가 가짜일까? - 306

 

그럼에도 나는 눈을 감고서 고독한 소년의 내부에 세워진 지의 기둥의 모습을 그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운 땅속 저 아래 솟구친 거대한 종유동의 기둥 같은 것이리라. 사람이 아직 발을 들인 적 없는 칠흑의 암흑 속에, 누구의 눈에도 닿지 않고 당당히 기립해 있다. 그 어둠 속에서 이백 년은 하찮은 시간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벽에 둘러싸인 도시'에 들어감으로써 그 '지의 기둥'을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지의 적적한 아웃풋 통로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옐로 서브마린 소년, 그 자신이 그대로 하나의 자립한 도서관이 될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크게 숨을 내뱉는다. 궁극의 개인 도서관 - 556

 

나는 오른쪽 귓볼을 손끝으로 살며시 만져봤다. 부드럽고 따뜻한 귓볼에 통증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통증이 남은 건 내 의식의 안쪽뿐이다. 그리고 그 통증은, 그 또렷한 잔존 기억은 이제 그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그건 뚜렷한 열을 품인 각인과도 같다. 한 세계와 또다른 세계의 경계를 초월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각인, 나는 아마도 그것을 내 존재의 일부로 간직한 채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 667

 

애당초 나는 지금껏 대체 무엇을 기다려왔다는 건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고나 있었을까?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명확해지기를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게 전부인 건 아닐까? 나무상자 하나에 들어간 더 작은 나무상자, 그 나무상자에 들어간 더 작은 상자, 끝없이 정묘하게 이어지는 세공품, 상자는 점점 작아진다. 그리고 또한 그 안에 담겨 있을 것도.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사십몇 년을 살아온 인생의 실상이 아닐까?

 

대체 어디가 출발점이었는지, 그리고 도달점이라 할 만한 것이 어딘가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판단하기 어려웠다. 아니, 어쩔 줄 몰랐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눈 녹은 물이 졸졸 흘러드는 수면을 쨍하니 맑고 싸늘한 달빛이 비추었다. 세계에는 여러 종류의 물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위에서 아래로 흘러간다. 자명하게, 아무런 망설임 없이 - 681

 

내가 원하는 건 그녀의 모든 것이 아니다. 그녀의 모든 것은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작은 나무상자에 다 담기지 않을 테다. 나는 이제 열일곱 살 소년이 아니다. 그 무렵의 나는 온 세상의 모든 시간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내가 손에 쥔 시간은, 그것을 쓸 수 있는 사용처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지금 내가 원하는 건 그녀가 걸친 방어벽 안쪽에 있을 평온한 따뜻함이었다. 그리고 그 특수한 소재로 만들어진 돔형의 컵 안쪽에서 맥박 치고 있을 심장의 분명한 고동이다.

 

그것은, 지금 와서 굳이 내가 원하기에는 너무 소소한 것일까? 아니면 너무 막대한 것일까? - 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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